굳이 서울에 살 필요가 있을까

어린 시절 가장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숲이 우거진 계곡과 탁 트인 잔디밭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시골에서 자란 아버지는 도시 생활이 힘겨웠는지 종종 나를 데리고 인적이 드문 자연을 찾았다. 나는 2살 때부터 서울 생활을 해왔지만, 늘 이렇게 생각한다. ‘굳이 서울에 살 필요가 있을까?’


대한민국 인구의 5분의 1이 대한민국 면적의 1%도 안 되는 서울에 벌떼처럼 모여 산다. 고층 빌딩 사이로 보이는 조각난 하늘, 심호흡하기 힘든 찝찝한 공기, 대기권을 돌파할듯한 기세로 치솟는 물가, 극단으로 치닫는 경쟁. 비정상적인 구조 안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평생을 경쟁의 메카에서 아등바등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현기증이 난다. 덜 벌고 덜 쓰면서 덜 경쟁적으로 살 수는 없을까? 지방으로, 시골로 눈을 돌리면 가능하다는 답이 나온다. 우리 부부는 한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본격적으로 서울에서 벗어나기 전에 서울 근교에서 전원생활을 해보기로 한 것이었다.

전원생활의 장단점은 명확하다. 장점은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는 점이다. 텃밭을 가꾸며 새로운 경험도 하고 생각할 시간이 많아져 글쓰기를 시작한 계기도 되었다. 손님 초대를 자주 하기도 했다. 마당에서 고기를 굽고 밤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며 분위기 있게 술 한 잔 나누면 전원생활의 낭만이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낭만은 잠시, 도시에서 아파트 생활만 했던 우리 부부에게 전원생활은 현타의 연속이었다.


3년 전 처음으로 농가 주택에서 살 때 주방에서 미키마우스(쥐)와 한바탕 소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불청객의 출입을 막기 위해 서둘러 세스코를 불렀다. 쥐는 머리가 들어갈 틈만 있어도 충분히 침투할 수 있다는 전문가의 말에 뜨악했다.


돌아보면 전원생활의 낭만과 현타 사이에서 현타가 올 때면 나도 모르게 그 상황에 대한 의미를 부여해 낭만을 되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야만 전원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조그마한 틈만 있어도 침투한다? 뜬금없이 ‘쥐’가 ‘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쥐와 죄는 인간을 병들게 하고 주변을 오염시킨다. 14세기 중기 전 유럽을 잠식했던 페스트의 주요 감염원이 쥐였다. 흑사병이라고도 불렸던 이 병으로 인해 당시 유럽 인구가 오분의 일로 줄어들었다.


인간의 죄는 어땠는가. 홀로코스트로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 가운데 절반이 넘는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 쥐와 죄는 글자 모양도 묘하게 비슷하다. 좁은 틈으로 파고드는 것도 기가 막히게 닮았다. 상한 감정으로 인해 마음 속에 약간의 틈만 있어도 죄가 파고든다. 그리고 곧 온 마음을 헤집고 다닌다. 끔찍한 쥐의 깜짝 출현으로 인해 무참한 죄의 비참한 속성을 곱씹어 볼 수 있었다.


미키마우스의 시대가 끝나고 한숨 돌리자 돈벌레(그리마)의 전성기가 시작됐었다. 조그마한 들쥐 한 마리는 그나마 귀여운 편이었다. 돈벌레는 다르다. 수많은 다리가 지네를 연상시킨다. 또한, 긴 촉수로 독을 뿜어낼 것 같은 자태를 뽐낸다. 때로는 둘씩 짝지어 다니기도 한다.


일단 돈벌레를 조우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다. 외모로 판단해 정말 미안하지만 딱 보는 순간, 징그럽고 혐오스럽다. "돈벌레는 돈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죽이는 거 아니다."라는 어르신들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어봤을 뿐, 돈벌레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인터넷으로 돈벌레를 검색해봤다. '정식 명칭은 그리마, 15쌍의 다리를 가진 절지류로 바퀴벌레, 파리, 모기 등 해충의 알을 먹고 살기 때문에 익충'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돈벌레'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습성 때문에 옛날에 가난했던 시절에는 부잣집에서만 볼 수 있었던 벌레'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익충인 돈벌레의 활약 덕분일까. 그러고 보니 전원생활을 하는 동안 바퀴벌레는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혐오스러웠던 돈벌레가 조금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돈벌레를 외모로만 판단했던 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외모 지상주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십수 년 전에 시작된 '얼짱, 몸짱' 열풍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인 미디어, SNS를 통해 전 연령대로 끝없이 확산 중이다.


아름다움을 선호하고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그러나 외모 지상주의는 상업적 패러다임이다. 개성을 무시하고 외모 정형화를 부추긴다.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의 외모와 격차가 클수록 패배감에 젖게 만든다.


지금 우리는 혐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여성과 남성, 진보와 보수, 약자와 강자 등 분노를 넘어 서로를 혐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임계점을 넘은 미투 운동은 시대 정신이 되었다. 외모에 대한 혐오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장애, 인종, 개취(개인 취향) 등에 따른 혐오로 '다름'의 가치가 '틀림'의 판단으로 전락해버렸다. 나 역시 언제든지 누군가에게 혐오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당시 생후 100일 된 아들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가 자라 사회로 나아갈 때는 외면이 아닌 내면이, 획일성이 아닌 개성이, 틀림이 아닌 다름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길. 아들에게 좋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나부터 돈벌레를 편견 없이 고마운 마음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아가 사회적 약자를 향한 더 큰 관심과 따뜻한 시선을 보내야 한다. 나와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다름의 가치가 옳음이 될 때 우리 사회는 한결 따듯해질 것이다.


여전히 나는 굳이 서울에 살 필요가 있을까 생각한다. 1년 반의 전원생활은 불편했지만, 도시 생활 때와는 다르게 자연을 통해 감사함을 느끼고 건강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자연의 일부인 아이도 자연과 함께 자연스럽게 자라가면 좋겠다. 평생 서울에 집 한 채 마련하기 위해 영혼까지 갈아 넣으며 사는 것보다는 불편해도 건강한 삶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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