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육아빠가 된 지 1달. 육아휴직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다. 육아휴직은 '휴직'이 아니었다. 누가 '육아(育兒)는 육아(育我)'라고 했던가. 상사와 고객의 갑질 사이에 샌드위치 신세였던 직장 생활과는 비교 불가다. 직장이 그리울 정도라고 말하면 아내와 아들이 몹시 서운해하려나.
아내가 일하러 자리를 비울 때면 나는 전업주부가 된다. 4개월 된 아들이 보채기 시작한다. 분유 기록 노트를 본다. 아들의 식사시간이다. 보채는 아들을 안고 커피포트의 전원을 켠다. 소독기에서 젖병을 꺼내 분유를 5스푼 넣는다. 물이 끓는다.
분유가 잠길 정도로 끓는 물을 붓는다. 막걸리를 마시기 전처럼 젖병을 휘휘 돌려 분유를 녹인다. 온도와 양을 맞추기 위해 끓이지 않은 물을 더 넣는다. 200ml 표시 선까지 맞춘 후 젖병을 양 손바닥으로 잡는다. 이번엔 가수 슈퍼주니어의 '쏘리쏘리' 춤을 추듯이 손바닥으로 젖병을 돌려가며 물과 분유를 잘 섞는다.
아들에게 분유를 주면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꿀떡꿀떡 원샷을 하거나 도리도리하면서 젖병을 피해 다닌다. 어떻게든 분유를 먹으면 다행이다. 문제는 무작정 울기 시작했을 때다. 갖가지 동물 소리를 내면서 달래도 안 된다. 기저귀도 갈고 앉혔다가 눕혔다가 안아도 안 된다. 아들이 좋아하는 모빌, 장난감, ‘쪽쪽이(공갈 젖꼭지)’로도 포효하는 아들을 잠재울 수 없다.
그렇게 한참을 씨름하다 녹초가 된 부자(父子). 아들은 거짓말같이 스르르 잠이 든다. 잠시 휴전의 평화가 찾아온다. 2시간 만에 찾아온 평화는 10분 만에 깨질 때도 있다. 잠이 깬 아들과 눈이 마주친다. 내 속을 알 리 없는 아들은 세상 해맑게 살인 미소를 짓는다. 미쳐버리겠다. 나도 웃는다. 그저 웃음 밖에 안 나온다. 아내의 귀가 시간만을 기다린다. 시계를 볼 땐 시간이 안 가는 것 같았는데 하루를 돌아보면 어느새 깜깜한 밤이다.
아내들이 남편의 퇴근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유를 온몸으로 깨닫는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대부분 여성이 육아를 전담한다. 육아는 부부가 함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경단녀', '워킹맘'의 고충을 겪고 있다. 이제 겨우 1달 된 초짜 육아빠에 불과하지만,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내가 느끼는 육아의 고충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태아의 심리 상태를 ‘새알’에 비유하였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아기는 가만히 있어도 편안하다. 자동으로 맞춰진 최적 온도에서 알아서 영양분이 공급되는 아늑한 공간에서 지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신생아는 엄마와 연결되어 있던 탯줄이 끊어지면 처음으로 불쾌감을 느낀다.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해결되었는데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 마치 우주선에서 케이블이 끊어져 무한한 우주 공간을 표류하는 듯한 황당함이라고 해야 할까. 불안, 불쾌, 불만족의 ‘3불 감정 세트’가 신생아의 심리를 지배한다고 생각하니 아들의 이유 없는 분노가 조금은 이해가 된다.
5월 21일, 정신을 차려보니 부부의 날이다. 휴직 중인 남편을 위해 돈 벌어 오느라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특별 식사를 준비했다.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쌈 채소로 쌈밥 한 상을 차렸다. 첫 수확의 기쁨이 풍성했다. 자연이 정성껏 키운 생명을 음미하니 4개월 전, 새 생명의 감동이 떠올랐다.
1월에 3kg도 안 되게 태어난 아들은 5월 현재 7kg이 넘는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간다. 생명은 기쁨이다. 자연은 생명을 주며 우리의 미약한 수고에도 넉넉한 선물을 준다. 텃밭에서 생명이 자라듯 우리 아이도 자란다. 자연이 주는 기쁨을 선물로 받은 부부의 날이었다.
그로부터 2달 후 어느 날, 텃밭에서 호미로 조심스레 흙을 팠다. 진한 갈색의 흙 밑에서 노란 얼굴이 드러났다. 생애 첫 감자 수확의 역사적 순간이었다. 귤만 한 크기부터 땅콩만 한 크기까지 다양했다. 역시 기대가 낮으면 만족이 큰 법. 근래 비가 많이 와서 다 썩진 않을까 노심초사했었는데 다행이다.
육아휴직 중인 육아빠로서 조신하게 이유식을 만들었다. 처음으로 신선한 감자가 들어간 요리다. 껍질 벗긴 감자를 한 조각 맛보았는데 달콤한 맛이 났다. 다음으로 알이 가장 굵은 감자 두 개를 골라 아내를 위해 닭갈비를 만들었다.
나는 엄청 맛있게 먹었는데 아내는 별 반응이 없다. 요리실력을 더 연마해야겠다. 같은 땅에서 같은 햇빛과 같은 빗물을 머금었는데 감자는 제각각 자랐다. 같은 조건에서도 잘 자란 놈들이 대견해 보인다. 인생역전의 자기계발서를 보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큰놈들이 작은놈들의 양분까지 다 빨아먹은 건 아닌지 씁쓸해지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민낯 같다고 해야 할까. 우리 아이는 대한민국 땅에서 어떻게 자라갈까? 그에 앞서 나는 부모로서 아이에게 어떤 밭이 되어줄 수 있을까?
동그란 아이의 머리를 보니 꼭 감자 같다. 나와 우리 아이가 약자를 위해 더 크게 나눌 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