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학기 반장 Apr 08. 2024

부부의 버킷리스트, 해외에서 한 달 살기


우리 부부는 정식으로 교제한 지 4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 2주 중 절반은 푸껫, 절반은 홍콩과 제주도에 머물 계획이었다. 푸껫 풀빌라에서 먹고 자고 마사지받으며 말 그대로 달달한 허니문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며칠 만에 핸드폰을 켰는데 동생에게 카톡이 와있었다. 


'오빠... 아빠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졌어. 병원에 입원 중인데 곧 수술할 거 같대. 신혼여행 중이라 오빠한테 말하지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미안해...'


평상시에 연락도 없고 사고만 치던 이복 여동생은 왜 하필 이때 연락을 해갖고. 미안한 거 알면 차라리 연락을 하지 말던가. 지금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 터지며 아버지를 걱정하는 마음보다 동생을 원망하는 마음이 앞섰다.


아내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조식을 맛나게 먹고 있었다. 아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아내는 무슨 일이냐며 캐물었고, 연기력이라곤 1도 없는 나는 그만 동생에게 온 카톡 내용을 실토해 버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날 푸껫에서 마지막 날을 보내고 다음날 바로 귀국했다. 나머지 절반의 신혼여행은 아내의 눈물과 함께 저 멀리 떠내려가 버렸다.



“우와! 여기가 천국이네!”라고 외치며 맥주 코너를 활보하는 아내의 뒷모습 포착



그때 일로 아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는데 가족 돌봄 휴직 3개월 중 1 달이라는 덩어리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 부부의 첫 해외 한 달 살기가 시작됐다. 담임 목사님의 도움으로 독일의 한인교회 목사님과 연결된 우리 부부는 독일 카셀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했다. 지도로 살펴보면 유럽의 중심에 독일이 있고, 독일의 중심에 카셀이 있었다. 카셀은 독일 전역을 여행하기 좋은 입지였고 독일은 유럽을 돌아보기 좋은 입지였다. 


우리 부부는 한 달 살기를 앞두고 서로의 버킷리스트를 나누었다. 아내는 파리에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렌터카로 유럽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답이 금방 나왔다. 독일에서 렌터카로 프랑스까지 여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현지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에어비앤비로 현지인의 집을 렌트했다. 우리 부부는 고즈넉한 전원주택 마을의 정취를 느끼며 귀국하면 언젠가 전원주택에 한 번 살아보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2017년에 독일을 방문한 우리 부부에게는 두 가지 큰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당시 대한민국이 "이게 나라냐"라고 외치며 촛불이 번져가던 때라 정치, 경제, 역사인식 등 배울 점이 많은 독일에서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또 하나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던 해라 루터의 행적을 좇으며 신앙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1층을 전체 렌트해서 묵었다. 아, 다시 가고싶다! (왼쪽) / 독일 집 주변의 마을 풍경, 화려하진 않지만 저마다 단아한 멋이 있다. (오른쪽)



한 달 동안 프랑크푸르트와 카셀, 아이제나흐와 비텐르크, 다하우와 보름스 등 독일 내 15개 도시를 여행했고 독일,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 등 4개국을 방문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세 가지 사건이 있다. 


첫 번째는 95개 조 반박문을 내걸며 종교개혁의 발상지가 된 비텐베르크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루터의 생가를 얼마나 잘 정비해 놨을지 설레는 마음으로 찾았지만, 한창 공사 중이라 헛걸음만 했다. 잔뜩 실망한 나를 아내가 위로해보려 했지만, 나는 아무 위로가 안 된다며 버럭 화를 냈다. 지금도 아내는 그때의 나를 흉내 내곤 한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조용히 분리수거하고 설거지를 해야지.


두 번째는 아이제나흐에서 셀카를 찍다가 사진의 아내 얼굴이 길쭉하게 나온 걸 보고 "오이 같다"라고 놀렸다가 아내를 울린 일이었다. 셀카 고자인 나는 카메라 렌즈의 굴곡 때문에 왜곡이 일어난다는 걸 몰랐다. 아내와 키를 맞춰서 최대한 사진 중앙에 얼굴이 오도록 찍어야 오이 같이 나오는 일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우는 아내를 달래느라 한 수제 버거 가게에 들어갔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고른 메뉴만 맛있어서 아내를 두 번 울렸다.



왼쪽 아래에 알콩달콩 재미있는 노부부가 앉아 있다.



세 번째는 분데스리가 직관이었다. 난생처음 축구장에 간 아내는 베를린과 뮌헨의 분데스리가 경기를 관람했다. 우리 부부 앞줄에 앉은 노부부가 인상적이었다. 할아버지는 뮌헨, 할머니는 베를린 유니폼을 입고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골을 넣을 때마다 서로를 약 올렸는데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우리 부부도 저렇게 늙자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귀국 후 상암에서 국가대표 친선 경기를 아내와 관람한 적이 있는데 아내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다. "역시 축구는 분데스리가야!"


우리 부부에게는 신혼생활 1년보다 해외에서 1달이 훨씬 더 밀도 높은 친밀감을 쌓는 시간이었다. 독일인과 영어로 소통할 때면 리스닝을 담당하는 아내는 귀, 스피킹을 담당하는 나는 입이 되어 한 몸을 이루는 체험을 했다. 하루하루 여행 코스를 내가 계획하면 길눈이 밝은 아내가 초행길을 안내했다. 2인 1각 경기를 하듯 손발이 척척 맞는 서로를 보며 신기해했다. 우리 부부는 더욱 친밀해지며 견고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학기 반장 연재]

월 : 이학기 스쿨의 월요일 진로반
화 : 이학기 스쿨의 화요일 독서반
수 : 이학기 스쿨의 수요일 작가반
목 : 이학기 스쿨의 목요일 직장반
금 : 이학기 스쿨의 금요일 고민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