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한 달 살기를 끝으로 가족 돌봄 휴직 3개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복직을 하니 조직에 구성원 변화가 있었다. 내가 본사에서 3년 가까이 고생한 후 휴직에 들어간 3개월 사이에 팀에 새롭게 합류한 후배가 한 명 있었다. 후배는 마치 3년 동안 있었던 터줏대감인양 껄렁껄렁한 태도로 나를 맞이했다. 조직도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날그날 이슈에 따라 하루살이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그동안 앞만 보며 달려왔던 내가 3개월 동안 잠시 멈춰서는 시간을 가진 탓일까?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 환경이 낯설었다. 나는 왜 회사에 다녀야 할까? 돈을 벌려고? 커리어를 쌓으려고? 비전이 있어서? 스스로 질문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게다가 직장 내 갭 이어 프로젝트를 하며 발견한 '소통'이라는 소명 가설과 소명 지도사 과정을 통해 발견한 '작가'라는 직업 가설이 계속 신경 쓰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괴리가 점점 크게 느껴졌다.
며칠 후 회사 게시판에 사내공모가 하나 올라왔다. '전략기획실 커뮤니케이션 TF 전략팀장'을 채용한다는 전배 공고였다. 커뮤니케이션? 소통? 나를 위한 자리구나! 당시 회사가 알바생 임금 체불 건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던 시기라 대내외 소통이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사내공모는 딱 1명을 뽑는 자리였고, 전략기획실은 SKY 출신들만 들어갈 수 있는 부서였다. 나의 합격 가능성은 희박했다. 아니, 불가능했다.
순간 "05화 나만의 직장 내 '갭 이어(Gap Year)' 프로젝트"(https://brunch.co.kr/@cpotss2023/263)에서 소개했던 사목님의 조언이 떠올랐다. 1단계 현재 부서에서 소명의식으로 일하기, 2단계 다른 부서로 이동해 보기, 3단계 이직하기 중에 2단계를 시도해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동안 소명을 찾아 치열하게 고민해 왔던 과정들을 포트폴리오로 정리하여 내가 '소통'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어필해 보기로 했다. 밑져야 본전 아니겠는가. 나는 무모한 도전의 주사위를 과감히 던졌다.
간절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대를 내려놓고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합격자 발표 공고가 올라왔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나보다 더 놀란 동료들의 걱정 반, 응원 반의 연락이 왔다. 약 8년간 쌓아온 영업 커리어를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택한 내가 의아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더 이상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이 아닌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 중요했기에 득실을 따져보지 않고 과감히 도전할 수 있었다.
회사에 꼭 필요한 포지션에 발탁되었다는 설렘과 중요한 일을 맡게 되었다는 중압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본사에서 가장 높은 층으로 출근했던 첫날을 잊을 수 없다. 현장 영업부터 시작한 내가 전략기획실까지 올라오다니 감개무량했다. 위기 대응을 위한 대외 커뮤니케이션 관련 일부터 하나씩 해나갔다. 그러던 몇 주 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나를 뽑은 사수가 갑자기 퇴사를 해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한참 배워야 할 게 많았는데 자기만 살고자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사수가 원망스러웠다. 보통 TF라면 최소 1년은 가는데 몇 개월도 못 가 흐지부지 되는 분위기였다. 예전 부서로 돌아가기도, 전략기획실에 남아있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소통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후 거취를 놓고 고민하던 중 사내홍보실장이 손을 내밀어주었다.
사내홍보실은 사내 기자들로 구성되어 회사 내 다양한 소식을 흥미롭게 전하는 곳이었다. 내가 원하던 소통에 가장 가까운 업무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내홍보실장과의 면담을 통해 또 한 번의 전배를 갈 수 있었다. 나는 사내홍보실에서 커뮤니케이션 TF 전략팀장 업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사내 기자로서도 역할을 해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과, 공대, 군대, 유통 생활을 해온 내가 기사를 써본 적이나 있겠는가. 내가 너무 섣부른 판단을 한 것일까? 난관이 계속되었다.
사내 기자들은 20대 후반의 젊은 후배들이었고 90%가 여성들이었다. 복잡 미묘한 감정선이 뒤엉키며 긴장감이 흐르는 직장 분위기가 상상되는가? 게다가 나는 공채라 성과 연봉제를 적용받는 반면, 그들은 전문직 연봉봉을 받았기에 나와 급여 차이가 많이 났다. 그들 눈에 내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자애로워 보였던 사내홍보실장은 태어나 처음 보는 워커홀릭이었고 예민한 여성 리더였다. 무엇보다 일을 질보다 양으로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시간을 무한한 자원으로 여기는 그녀는 자정까지 야근을 시키는 것은 물론, 휴일에도 일하는 것을 즐기는 듯 보였다.
실장과 후배들 사이에 낀 나는 양쪽 눈치를 보느라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날마다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실장이 처음에 내게 손을 내밀어줬을 때는 내가 사내 기자로서 글을 쓰며 소통하는 업무를 할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팀에 합류하고 나자 실장은 나를 후임자로 키워서 본인은 탈출할 생각도 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실장은 기본적으로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 마음이 과잉된 탓에 본인은 물론 팀 전체가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장은 6개월도 안 되는 시간 동안 10명 남짓한 팀원들로 거의 매달 조직 개편을 했고, 책상 배치를 바꾸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글도 한 번 못 써보고 업무 롤도 분명치 않은 애매한 인간이 되어갔다. 치열하게 취재하고 글을 쓰는 후배들 눈에는 내가 글도 못 쓰고 월급만 많이 받는 무능한 대리로 보였나 보다. 하루는 후배들 중 목소리가 가장 큰 한 명이 내게 와서 말했다.
도대체 대리님은 하는 일이 뭐예요?!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황당한 질문에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느 조직에서나 항상 인정받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내 삶을 좀 더 가치 있게 살아보려고, 회사에 좀 더 기여를 해보려고 선택한 도전의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이었나? 내가 괜한 헛된 짓을 해서 이런 취급을 받는 걸까? 남자 후배였다면 당장 옥상으로 끌고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자 후배의 정곡을 찌르는 말 덕분에 나는 명치가 타들어가는 듯한 분노를 삼키며 인생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를 맞이했다.
[이학기 반장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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