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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Apr 22. 2024

[첫 번째 육아휴직]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사내홍보실에서 나는 실장 다음으로 직급도 높고, 나이도 많은 편이었지만, 글과 관련된 아무 경력이 없었기에 사실상 막내나 다름없었다. 후배에게 "도대체 대리님은 하는 일이 뭐예요?!"라는 말을 듣고 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일단 직급, 나이 모두 내려놓고 나는 낮은 자세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독인 줄 알았던 후배의 일침이 약이 되었다. 실장에게 나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저도 매일같이 야근하면서 팀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아서 하고 있는데 팀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저는 실장님께 글을 쓰고 싶다고 말씀드려서 이 팀에 합류했는데 제가 민폐만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실장은 눈치를 챘는지 나한테 정식으로 기사 쓰는 법을 배우라고 했다. 정이 많고 섬세한 실장은 회사에 승인을 받아 나의 학원비를 지원해 줬다. 나는 처음으로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자유기고가> 과정에 참여해 기사 쓰는 법을 배웠다. 내가 완성한 6개의 포트폴리오 기사와 이론을 정리하여 팀원들에게 나눠주고 피드백을 부탁했다. 다들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막내급 기자들은 정잘 놀랐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하지만 내게 하는 일이 뭐냐고 따졌던 선배(?) 기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뭐라고 해봐요, 선배님!  


하지만 그 이후로도 나는 기사를 쓰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실장도 여러 관계와 입장을 고려한 복잡한 계산 법으로 머리가 아팠을 것이다. 유통에 있을 때는 그리 많은 월급도 아니었는데 사내홍보실에 오니 나는 고연봉자가 되어버려서 실장이 나를 단순히 사내 기자로만 쓰기에는 명분이 안 섰을 것이다. 미리 이야기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본인도 거기까진 생각 못했겠지.


대신에 실장은 '칸반'이라고 부르는 채널을 내게 맡겼다. 본사 곳곳에 있는 공지용 모니터에 띄울 카드 뉴스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룹 전체의 중요한 공지사항, 공정거래 및 윤리경영 등 필수지식, 경영 이념, 계열사 소식 등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콘텐츠를 구성해야 했다. 그룹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이다 보니 단어 하나, 문장 하나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기사와 어울리는 이미지를 찾는 것도 일이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공들여 작업을 해도 매의 눈으로 기다리고 있는 실장에게 통과하려면 최소 밤 10시 이전에 퇴근은 불가능했다.


실장에게 수십 차례 퇴짜를 맞고 겨우 통과해도 마지막 관문이 남아있었다. 최종본에 대한 그룹사 임원의 컨펌이었다. 만에 하나 임원의 컨펌이 떨어지지 않으면 계속 기다려야만 했다. 마감 날에는 퇴근 이후에도 자정 넘어 실장, 임원과 계속 소통해야 했다. 힘든 과정이었던 만큼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웠다. 혹독했던 훈련 덕분에 지금 글을 쓸 때도 어떤 이미지가 어울릴지, 어떤 단어를 쓰는 게 좋을지, 내용이 독자에게 직관적으로 잘 전달될지 등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역시 공짜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엄마를 하늘로 떠나보내며 내 인생의 성공 기준을 '하루에 최소 한 끼는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삶'으로 정의했건만, 다시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오래된 전원주택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겁이 많은 아내는 해가 진 후에 홀로 전원주택에 있는 것을 무서워했다. 퇴근 시간이 점점 늦어지면서 아내를 걱정하는 마음에 무언가 결단이 필요했다. 마침 첫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내와 상의해 나는 처음으로 육아휴직 6개월을 신청했다. 


당시에 썼던 글로 생생한 마음을 나눈다. 

‘누구나 다 이렇게 사는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나. 회사 생활 10년 차가 되었을 때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아빠가 된 선배들은 하나같이 “출퇴근할 때 항상 아기가 자고 있으니 주말에도 아빠 얼굴을 못 알아보더라”라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는 갓 태어난 첫아이에게 적어도 아빠 얼굴이 어떤지는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 가는 경이로운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육아휴직을 했을 때 지인들은 아이와 함께하는 아빠라서 부럽다고 했다. 나도 아이와 함께해서 좋았다. 하지만 육아휴직 급여로 받은 돈은 월 100만 원 남짓. 그마저도 4개월째부터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아내도 일을 했지만, 파트타임이라 둘이 합치면 겨우 월 150만 원 정도였다.

분유, 기저귀, 이유식 재료뿐만 아니라 카시트, 유모차, 보행기 등 들어가는 돈이 끝도 없었다. 모아둔 돈으로 버티고 버티다 보니 통장은 어느새 ‘텅장’이 되어버렸다. 가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견디며 살았다. 월요병에도 시달렸다. 휴직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저녁만 되면 괜히 기분이 다운되었다. 평일도 주말 같은 생 활을 하면서도 주말이 되어야만 안도감이 들었다.

육아휴직 6개월을 아내와 충분히 상의했기에 아내는 마음 편히 쉬라고 위로해 주었다. 이런 아내가 세상에 어디 있나 싶어 고마운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스마트폰 단체 채팅방을 통해 동기의 특진 소식, 후배의 승진 소식이 들려왔다. 불안감이 다시 엄습했다. 나는 또 나에게 질문했다. ‘지금 잘 사는 걸까?’

육아는 부부가 둘이서 해도 너무 힘들다. 나보다 먼저 아빠가 된 친구는 ‘육아는 하루 24시간 안에 36시간 분량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을 이제야 실감한다. 특히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면 별짓을 다 해보아도 그치지 않을 때가 있다. 총체적 난국으로 멘붕, 유체 이탈을 간접 경험한다.

최근에는 아이가 감기로 일주일간 병원에 입원했다. 고사리 같은 손에 주삿바늘을 꽂자 몸서리치며 역대급 통곡을 했다. 일주일간 우리 부부는 하루 평균 2시간씩 자며 아이를 간호했다. 힘들고 예민해지는 나날들, 그럼에도 아이의 해맑은 미소를 보면 잠시나마 천국을 경험한다.

여전히 불안하고 질문 가득한 인생이지만 나는 지금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을 누린다. 누군가가 “지금 너는 잘 살고 있니?”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리라. “그래, 지금 나는 잘 살고 있다!”


- 나의 첫 책 <서른 넘어 찾아온 다섯 가지 기회> 중에서





[이학기 반장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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