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기, 삶이라는 낯선 여행에 대하여

치열함을 내려놓고 마주한 남한강의 물안개

by 카피츄

초석을 다지겠다는 핑계로 무거운 철학과 생존의 잣대를 들이대며 아홉 편의 글을 연달아 쏟아냈다. 글을 쓰는 작가가 과부하가 걸릴 지경인데, 읽는 이들의 피로도는 오죽할까. 숨을 고를 쉼표가 필요한 타이밍이다.

사실 제대로 된 글을 쓰지 않은 지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인생의 거대한 고비를 정면으로 마주했고, 내가 알던 궤도와 완전히 다른 삶의 지형을 걷게 되었다.

잠시 나침반의 방향을 읽고 방황했던 시간, 폭풍이 지나가고 나니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의 도수와 프레임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파편처럼 부서진 일상을 추스르는 데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과거의 알량한 지식과 미련을 다 버리고 완전히 리셋해버릴까?', '남은 생은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자연인처럼 세상과 철저히 단절한 채 살아갈까?' 숱한 상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거창한 자연인이 아니라도 적어도 예전처럼 스로틀을 끝까지 당기며 아등바등 살아가지 않고 차분하고 고즈넉하게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다.


문명이 고도화된 도심 한복판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치열한 마찰을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종종 지도를 펴 노후를 보낼 피난처를 가늠해보곤 한다.

경기 양평, 하남, 광주나 북부의 연천, 포천 아니면 아예 발길이 뜸한 전남 진도, 광양, 장흥, 영암 같은 곳들. 묘한 끌림에 사두었던 경기 광주와 안산의 작은 땅, 아버지가 마련해 두신 장흥의 밭, 외가 식구들이 있는 광양까지. 어떻게든 둥지를 터볼 구석은 꽤 있다.


지난 금요일, 도심의 치열함을 잠시 로그아웃하고 1박 2일의 짧은 힐링 여정을 떠났다.

첫 목적지는 내 이름표가 붙은 경기 광주의 작은 땅이었다. 푸른 잎이 무성한 나무들과 산 아래 조용히 자리 잡은 마을회관을 마주하니 뾰족했던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밭을 일구는 이웃의 부지런한 몸짓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벌써 은퇴 후 노후의 한 자락에 들어와 있는 듯한 편안함이 밀려왔다.


차를 몰아 양평 두물머리로 향했다. 평일 이른 점심시간임에도 벚꽃 흩날리는 산책로에는 나들이를 나온 커플과 가족들로 제법 활기가 돌았다. 만개한 꽃나무 아래서 멋쩍게 구도를 잡고 있는 중년 커플에게 다가가 "제가 한 장 찍어 드릴까요?" 라며 오지랖을 부려보았다. 이쁘게 담아낸 사진 한 장에 쏟아지는 칭찬이 은근히 기분 좋은 도파민을 돌게 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두물머리는 고요하면서도 웅장했다. 가로수처럼 도열한 연꽃잎 사이를 홀로 거닐며 한껏 낭만을 부려본다. 발길은 명물 연핫도그 매장 옆 소품샵으로 향했다.

혼자 누리는 여유가 못내 미안했던 걸까. 쓸만한 면 손수건 두장과 예쁜 분홍색 머리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여행지에서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빈손을 채우는 행위는, 꽤 기분 좋은 지출이다.


사색의 걸음은 자연스레 황순원 문학관으로 이어졌다.

다시 읽어도 좋은 소설 [소나기]의 감수성이 새삼 충전되는 기분이다. 문학관의 깔끔한 운영과 관람실의 디테일에 적잖이 놀랐다. 2천 원이라는 입장료가 무색하게 평일에도 분주히 관람하는 학생들의 열기가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산책로의 조경 관리가 훌륭했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마치 내 플리를 훔쳐본 듯한 취향을 저격했다.

1박을 묵었던 문호리의 숙소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에 가격, 위치, 인테리어 모두 부족함이 없었다. 숙소 옆 리버마켓에서 가벼운 아이쇼핑을 즐기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비가 내린 토요일 새벽,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가보니 강물 위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절경이 나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시각적인 자극이 필요해 미술 작품이 있는 '구하우스(Koo House)'로 향했다. "소유보다 공유다." 정보와 지식의 카피레프트(Copyleft)를 지향하는 내 삶의 궤적과 맞닿은 이 문구가 유독 마음에 깊이 꽂혔다.

짧지만 완벽했던 여정의 마침표를 찍을 시간. 어디로 갈까 검색해 보니 문호리 건너편 남양주에 '스타벅스 더북한강R점'이 눈에 들어왔다. 스벅 커피를 마셔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지만, 통창 너머로 흐르는 뷰와 커피 맛은 기대 이상이다.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한결 가벼워진 머리로 이글의 마지막 문장을 갈무리한다. 치열하지 않아도 괜찮은, 이 완벽하고도 슴슴한 하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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