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팍한 의도와 조용한 삭제

PC방 앞에서의 1시간 30분

by 카피츄

며칠 전, 최근 알게 된 어떤 이와 겪은 에피소드다.

​업무차 알게 된 그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2주 정도 옆자리에서 근무하며 가끔 대화를 나눈 게 전부였고, 그가 퇴사한 후 구정 명절 인사조차 주고받지 않은, 딱 그 정도의 가벼운 사이였다.

​그런 그에게서 불쑥 전화가 왔다.

통화의 첫마디는 자신이 최근 보험 회사에 취업했으며, 단 10영업일 만에 약 200만 원을 벌었다는 자랑 반, 정보 반의 이야기였다.

​2008년 무렵부터 약 5년간 보험업계에 몸담으며 변액보험 자격증까지 땄던 나로서는 너무나 익숙한 레퍼토리였다. 목적은 명확하다. 내게 보험 상품을 하나 소개하거나, 자신과 함께 일하자고 리쿠르팅을 하거나. 그 외의 순수한 안부 전화일 확률은 0에 수렴한다.

​그는 내 과거 스토리를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교보생명을 시작으로 법인 대리점(GA), 삼성화재 등에서 근무했던 내 이력을 조용히 읊어주었다.

A+에셋 같은 대리점 이야기도 들려주었고, 더 디테일한 이야기도 들려줄까 했지만 참았다.

나의 투명한 솔직함에 당황한 걸까? 그는 황급히 자신은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전화한 것이라며 말을 돌렸다.

​나는 이런 지점에서 묘한 흥미를 느낀다.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들켰을 때,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인물을 만나기란 참 드물다. 나는 그 드문 '정직한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재미있거나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변명으로 얼버무리는 그를 보며 속으로 옅은 실소를 머금었다.

​상기해 보면, 뜬금없이 내게 연락을 취한 건 그였다. 심지어 나는 PC방에서 배틀그라운드를 한창 하던 중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예의를 지키려 헤드셋을 벗고 밖으로 나와 공손히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어느새 종교로 넘어갔다.

가톨릭 신자이며 성가대 활동도 한다는 그는 내게 물었다.

"OO(Chu)은 교회 안 다니지?"

​짧은 침묵 속에서 생각이 깊어졌다. 나는 아주 독실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신앙을 가진 크리스천이다. 유대교에서 시작해 정교회,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 등으로 분화된 종교의 거대한 흐름을 이해하고, 구약의 창조론과 이스라엘의 역사, 그리고 신약이 말하는 '예수님의 희생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마음에 두고 있다.

​아마도 일전에 내가 무심코 던진 "종교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의 뇌리에 거슬리게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내 화법은 다소 보수적이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진짜로 '싫어하는' 부류는 무례하거나, 선을 넘어 죄를 짓고 세상에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사랑을 입으로만 부르짖는 게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맹목적인 타이틀보다 따뜻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을 나는 좋아한다.

​이런저런 철학적인 대화가 오간 뒤, 이야기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스무 살이나 어린 베트남 여성과 결혼해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두 딸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반면, 나는 22살 아들과 고3 딸을 둔 아빠다.

​치열했던 양육의 챕터를 지나온 나는 지금 무척 홀가분한 삶을 살고 있다. 세상에 대한 무리한 기대 없이 살아간다. 조금 건방지게 들릴지 몰라도, 나는 지금 내 일상이 머금고 있는 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가 좋고, 이것이 타인에 의해 어지럽혀지는 게 싫다. 일찍 결혼해 20년 가까이 치열하게 살아냈으니, 이제는 남은 인생을 그렇게 무겁고 복잡하게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PC방 밖에서 그와 통화한 시간은 무려 1시간 30분.

기나긴 통화가 끝난 후, 나는 대화 중에 언급했던 내 과거 이력들에 대한 '증명'을 카카오톡으로 보냈다. 그는 다음 날이 지나도록 메시지를 읽기만 할 뿐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나는 그의 연락처를 조용히 지웠다.

내 평온한 일상에서, 불필요한 소음 하나가 말끔히 정리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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