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집의 톱기계 소리와 롤(LoL) 티어가 내게 가르쳐준 진짜 목적지의 의
경기도 오산에 살던 때였다. 어느 날 갑자기 '목공'이라는 낯선 분야에 꽂혀버렸다. 거창한 예술적 갈망 같은 건 없었다. 대로변에 있던 '나무와 케이크'라는 빵집에 들어선 것이 전부였다. 빵집 카운터 너머 깊은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상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알고 보니 목공 선반에서 원목이나 집성목을 켤 때 나는 소리였다.
그저 그 소리가 궁금했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100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을 결제하고 빵집 남자 사장님께 목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왜 배우려는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목적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돌이켜보면 내 삶의 궤적은 늘 이런 식이었다. 어려서 나는 거창한 꿈이나 도달하고 싶은 명확한 목적지가 없었다. 그저 돈이나 많이 벌고 싶었고, 어머니가 음식을 잘하시니 나중에 고깃집이나 하나 차려볼까 하는 가벼운 몽상 정도가 전부였다. 다행히 타고난 언변이 있었고 꽤 약삭빠른 구석도 있었지만, 입만 살아서는 세상을 온전히 살아낼 수 없다는 것쯤은 일찍이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실질적인 무기가 쥐어진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어머니가 현금 뭉텅이를 꺼내 사주신 486DX2 컴퓨터. 당시 반에서 집에 컴퓨터가 있는 아이는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나는 그 3분의 1의 아이들, 그리고 다른 반 녀석들의 집까지 불려 다니며 MS-DOS를 깔아주는 '동네 PC 반장' 노릇을 했다.
플로피 디스크 10장에 담긴 DOS 6.0과 MDIR, 그리고 몇 가지 게임을 설치하기 위해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내 컴퓨터 OS만 백 번은 넘게 밀고 다시 깔았을 것이다. 마우스로 클릭만 하면 되는 지금의 GUI(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와 달리, 까만 화면에 하얀 글씨만 뜨는 텍스트 기반(TUI)의 운영체제는 컴퓨터의 논리적 속성을 밑바닥부터 파악하지 않으면 부팅조차 시킬 수 없었다. 학원 한번 다닌 적 없었지만, 나는 유희를 위해 응용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스스로 시스템을 통달해 나갔다.
재미있는 건, 그때 '컴퓨터와 인간이 소름 돋게 닮아있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는 점이다. 운영체제와 깔려 있는 응용 프로그램에 따라 한없이 단순해지기도, 끝없이 복잡해지기도 하는 그 속성. 인간의 본질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이 철학적인 깨달음을 어른들 앞에서 떠들었다가 등짝을 한 대 맞은 이후로는 속으로만 삼켰지만 말이다.)
명확한 목적 없이 덤벼든 그 난잡한 독학의 시간은, 훗날 내 직장 생활의 강력한 생존 기술이 되어주기는 했었다. 로터스 1-2-3부터 만져본 짬바 덕에 엑셀 함수 몇 개로 남들보다 빠르게 문서를 찍어냈고, 사무실 벽면에 랜선을 따서 몰딩으로 마감해 주면 사람들은 "우와" 하며 나를 치켜세웠다.
그러다 디자인을 하면서는 어떤 위치에 점 찍고, 문장이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허둥거렸다. 깨닫는 데는 10년이 더 걸렸다.
시간이 흘러, 내 아들의 등짝을 보며 이 '목적지와 배움'에 대한 거대한 사회적 모순을 마주하게 되었다.
초등학생이던 아들에게 리그 오브 레전드(LoL) 1대1 대결에서 철저하게 몰수패를 당한 후, 나는 조용히 롤을 접고 스타크래프트와 배그로 피신했다. 그 후로 아들이 '리신'을 픽해 정글을 헤집고 다니는 신들린 플레이를 등 뒤에서 감상하는 것이 내 소소한 낙이 되었다. 녀석의 티어는 전국 상위 1만 명 대에 들 정도로 압도적이었고, 재학 중인 고등학교 안에서 최상위권의 랭커였다.
넌지시 프로게이머나 BJ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녀석은 쿨하게 고개를 저었다.
롤에 미쳐있는 녀석의 화려한 계정을 보며 나는 물었다. "수능이나 롤이나 결국 똑같은 '줄 세우기'인데, 롤에서 상위 1%로 줄을 서면 세상은 알아주지 않으면서 수능에서 상위 1%로 줄을 서면 엄청나게 대우해 주는 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
아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세상의 룰이라며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게 너무나 기괴하고 이상하다.
한국 사회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대개 실전적인 문제 해결 능력이나 창의성이 아니라 '특정한 암기를 기계적으로 얼마나 잘 해내는가'에 대한 가산점이다.
학창시절 스피치를 기가 막히게 하거나, 사람들을 모아 토론을 이끌고, 참신한 기획을 내놓는 능력은 수능이라는 채점표에서 아무런 점수도 받지 못한다. 수능이라는 확고한 '목적지'를 향해 12년을 내달려 명문대에 도착한 동료들 중, 정작 자기 전공에 아무런 애정도 지식도 없는 텅 빈 사람들을 나는 사회에서 수없이 목격했다. 그들이 도달한 곳은 스스로 정한 목적지가 아니라, 사회가 컨베이어 벨트처럼 밀어 넣은 종착역일 뿐이었다.
다시, 오산의 빵집 기계음으로 돌아가 본다.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려고 그 발을 디뎠을까? 목적지도 없이 100만 원을 내고 시작한 목공 수업의 결과물은, 작고 삐뚤빼뚤한 책상 하나와 벽 선반이 전부였다. 내 호기심의 결말은 딱 거기까지였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수능 1등급을 향해 책상에 앉아있는 것이 '옳은 배움(정답)'이고, 기계음에 이끌려 목공을 배우고 플로피 디스크를 들고 동네를 배회하며 롤 티어를 올리는 것은 '틀린 배움(오답)'일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 이 둘은 본질적으로 같다. 일부를 제외하면, 양쪽 모두 자신이 진짜 가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발을 내딛고 달리기 때문이다.
가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곳에 다다를 수 있겠는가?
아무리 1%의 압도적인 실력과 재능을 갖춘 사람이라도, 명확한 목적지 없이 달리면 결국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좌표를 잃어버리게 된다. 하물며 우리처럼 압도적인 천재성이나 능력이 부족한 평범한 사람들은 어떨까?
스스로 설정한 목적지 없이 남들이 뛰니까 불안해서 뛰고, 당장의 굉음이 재밌어서 무작정 스로틀을 당기다 보면, 십중팔구 자신이 전혀 원하지 않았던 낯설고 이상한 곳에 다다르고 만다. 그리고 마흔이 넘고 쉰이 넘어 불혹의 끝자락에 섰을 때야 비로소 주변을 둘러보며 뒤늦은 질문을 던진다. '어,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여기에 서 있지?'
아무리 배기량이 높은 훌륭한 엔진을 달고 있어도,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지 않으면 영원히 도로 위를 방황할 뿐이다. 우리가 이 길고 피곤한 삶에서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속도가 뒤처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닿고자 하는 진짜 목적지가 어디인지, 스스로 제대로 정의(Definition)해 본 적 없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