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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ine Mar 05. 2023

Normal 에서 New Normal로 上

2년간의 중국 유학생활 돌아보기

처음 중국으로 오게 된 것은 2018년이었다. 상해교통대학교로 문화 교류 및 인턴십 기회를 얻었던 나는 빠르게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을 보면서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대학 생활 4년 동안 중국에 대한 인사이트를 키워갔다. 학사 졸업 후에는 중국 현지 시장을 더 가까이서 관찰하고 싶어 결국 중국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고, 2021년 10월 1일, 불안한 마음을 가득 안고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2020년 2월부터 유행한 코로나바이러스는 2년간의 유학 생활 중 1년 반이나 차지하였고, 남은 마지막 학기도 완전히 코로나바이러스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갑작스러운 중국의 위드 코로나 정책과 함께 드디어 자유로운 유학 생활을 보내고 있다. 


석사 진학을 위해 북경으로 출국하는 과정은 정말 순탄치 않았다. 예전에 비해 까다로운 비자 처리, 부르는 것이 값인 비행기 표 때문인지 중국으로 석사를 진학하는 한국 학생들도 확실히 줄어든 느낌이었고, 정확한 정보 하나 없이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물론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의 초기였기 때문에 여행, 유학 자체가 모두 어려웠지만, 한 달 격리는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였다. 편도 20만 원이었던 비행기를 3배 이상의 가격을 주고 사야 했고, 일부 여행사에서 대량으로 비행기 표를 구매한 탓에 비싸게 파는 표를 울며 겨자 먹기로 사는 유학생들도 많았다. 그리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유학생에게는 약 한 달이라는 시간을 140만 원이 훌쩍 넘는 비용을 지불하며 격리를 하는 것 자체가 시간적, 금전적으로 모두 부담이었고, 유튜브나 블로그와 같은 SNS를 통해 보는 중국 격리시설 후기들은 끔찍하고 무서웠다. 혹여나 격리 시설에서 진행하는 핵산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기라도 하면 중국 내 병원 혹은 제3 격리 시설로 끌려가 알 수 없는 검사들을 해야 한다는 글들은 더욱더 중국행 비행기 탑승을 망설이게 했다. 하지만, 격리가 사라지길 기다릴 때까지 마냥 중국으로 가지 않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2021년 10월 1일, 드디어 코로나 시국의 중국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정말로 다른 국가로 떠나는 유학생보다 몇 배는 복잡하고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大白와의 조우 

중국 내 유행하는 신조어로 ‘大白’란 단어가 있다. 큰 흰색, 흰색 방역복을 입은 방역 요원을 지칭하는 말이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북경 수도 공항에 내리자마자 인터넷에서 사진으로 보기만 했던 흰색 방역복을 입은 大白가 승객들을 기다리며, PCR 검사소와 입국장으로 인도하였다. 활기를 띠던 공항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고, 여행 가방을 옮기던 컨테이너 벨트도 모두 멈춰 있었다. 입국 수속을 마친 후에는 격리 시설로 인도하는 총 3대의 버스에 탑승하였다. 당연히 어디로 향하는지 알려주지 않았고, 같은 비행 편을 탑승하는 사람들이 있는 위챗 대화방에서 그저 환경이 좋은 시설로 갈 수 있길 기도하는 것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1시간을 달려 베이징의 외곽인 통저우의 격리 시설에 도착하니 방역 요원들이 마스크를 나눠주며 여행 가방과 짐 곳곳에 소독약을 뿌려 댔다. 

베이징시 통저우의 격리 호텔 전경

 이번 코로나 시국을 겪고 난 후, 중국이 외국인에게 불친절한 나라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단순히 서비스 태도나 사람들이 불친절하다는 것이 아닌, 중국에서 생활하고 체제를 따르는 데 있어서 외국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친절에 가깝다. 그리고 격리 시설에서 그 과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좌) 격리 호텔 시설, (우) 격리 호텔 반찬

먼저, 격리자 정보 등록을 위해서는 현지 중국 번호와 주소가 필요했으나 대부분의 외국인이 현지 전화번호와 거주지가 없어서 지인의 정보를 빌려 기재할 수밖에 없었다. 격리 비용 지불 역시 격리 호텔의 상황과 시스템마다 달랐다. 일부 호텔은 현금을 받지 않았는데 중국에 처음 입국하거나 오랜만에 방문하는 외국인들이라면 현지 은행 계좌가 없는 경우가 많았고, 중국에서 자주 사용하는 위챗 페이와 알리 페이는 당연히 개설할 수 없어서 지불 과정에서도 순탄치 않은 경우가 많았다. 모두 모바일 페이가 있는 사람에게 한화를 송금해 지불하거나 현금다발을 미리 한국에서 인출해 지불하는 등 온갖 수고스러움을 겪었다. 비용 자체도 지원이 되지 않는 유학생에게는 만만치 않았다. 내가 묵은 격리 호텔은 21일간의 정부 격리 중 정부 지원 7일이 적용되어 14일 격리 비용만 지불하면 되었지만, 약 7,200위안 (한화 약 140만 원 상당)이었다. 학교에서는 당연히 격리 비용에 대한 지원이 없었고, 21일간의 정부 격리가 끝난 후 7일의 건강관찰 기간에도 학교 호텔을 이용할 수 없어서 모든 격리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야 했다. 같은 항공편을 타는 직장인들, 이곳에 기반이 있는 사람들과 달리 최소 200만 원 이상의 비용을 준비해야 하는 유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격리’라는 것이 큰 부담이 되는 단어였고, 숙소의 환경 역시 제 가격을 하지 못하는, 상상 초월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슬기로운 격리 생활 

슬기롭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매일 아침 7시 검역관들이 나눠주는 아침, 점심, 저녁을 먹고 학교 수업을 듣다 보면, 햇빛 하나 들지 않는 방에서 쑥만 먹으며 인간이 되길 기다리는 곰이 된 기분이었다. 일부 격리자들은 한국에서 미리 반찬, 밥 등을 준비해서 왔으나 기숙사에 넣을 짐이 많았던 유학생들은 짐을 줄이고자 추가적인 음식 등을 들고 오지 않아서 21일간 배를 곯다가 북경 한인회에서 넣어준 음식을 통해 연명할 수 있었다. 성의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밥을 보며 격리자 모두 격분하였고, 취소조차 되지 않아서 억울함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부실한 밥부터 대우까지 어느 하나 만족스러운 것이 없었고, 베이징 중심가에서 훨씬 떨어진 통저우에 격리 숙소가 있었기 때문에 격리 해제 후 이동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이렇게 격리가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7일간의 관찰 격리가 남아 있었다. 북경에 거주지가 있는 사람들은 본인이 거주하고 있는 구의 허락을 받으면, 집에서 관찰 격리를 할 수 있었지만, 유학생들은 학교의 규정에 따라 학교 호텔에서 격리하거나 외부 호텔에서 미리 격리하고 학교로 들어와야 했다. 당시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서인지 외국인을 받아주는 호텔이 없었고, 직접 한인 민박 혹은 외국인 수용이 가능한 호텔을 찾아야 했다. 이런 험난한 과정 때문인지 중국 유학 자체를 포기하는 유학생들도 늘었고, 나 역시도 몇 번이나 중국으로 유학을 온 이유를 되묻기도 하였다. 혹여나 양성 판정을 받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고, 모든 불확실한 상황이 공포감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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