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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ine Mar 05. 2023

Normal에서 New Normal로 中

2년간의 유학생활 돌아보기 


텅 빈 캠퍼스 

칭화대학교에서 처음 설립된 영문 석사 프로그램 Global Business Journalism은 글로벌 시장에서 활동할 미디어 분야의 인재를 양성하는 과정이다. 우크라이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베트남,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온 15명의 인재가 모여 있고, 모든 수업은 중국인 현지 교수님과 미국인 교수님들께서 함께 수업하시기 때문에 세계정세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 글로벌한 분위기, 국제 커뮤니케이션 스킬 등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나와 다른 문화권에서 온 친구들을 만날 생각으로 고대하며 간 캠퍼스였지만, 격리가 끝나고 돌아온 학교에는 15명의 학생 중 나를 포함해 5명만이 캠퍼스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학생 비자가 한국인과 일부 탄친 비자 (가족비자)를 통해 들어오는 화교 학생들에게만 허락되었기 때문에 학교에 있는 실질적 외국인인은 한국인뿐이었다. 2019년도에 방문했던 칭화대는 글로벌 지구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코로나로 학생비자마저 발급이 어려워진 이후부터는 중국과 해외 왕래를 쉽게 할 수 있는 화교 학생들의 비율이 높아졌고, 일부 일대일로 국가에서 온 유학생들만 받게 되어 학과의 장점인 ‘국제화’도 사라지게 되었다.  

하이브리드 모드로 진행되었던 수업 풍경

수업 역시 하이브리드 모드로 진행되었다. 일부 미국인 교수님들은 중국으로 들어오는 비자를 받지 못해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온라인 화상 플랫폼을 통해서만 교수님을 뵐 수 있었고, 현지 캠퍼스에 계시는 교수님들의 수업은 학교에 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현장 강의와 온라인 수업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심지어는 현장 강의에 나만 교실에서 수업을 들은 적도 많았고, 코로나 확진자가 많은 도시에 방문한 친구들은 국적과 상관없이 한동안 캠퍼스로 출입할 수 없었다. 학생들이 각기 도처에 있다 보니 수업 시간을 정하는 것도 문제였다. 특히 중국과 시차가 꽤 나는 학생들을 조금이나마 배려하고자 밤 9시에 수업을 할 때면 자정이 지나서야 겨우 기숙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상해 봉쇄중국 봉쇄의 서막 

격리를 끝내고 캠퍼스로 돌아왔을 때는 생각보다 중국의 코로나 상황과 규정이 엄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격리 규정이 꽤 까다로웠지만, 막상 중국 생활 자체에서는 크게 제약이 있지는 않았고, 출입 시에는 건강마를 스캔하고, 싱청마 (개인의 행적 및 동선을 체크하는 애플리케이션)을 항상 켜야 하는 불편함 외에는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할 수 있었다. 봉쇄도 없었고, 마스크 착용 규정도 엄격하지 않은 편이었다. 믿을 수 없는 통계지만 확진자 수도 적었고 베이징은 비교적 안전한 편이어서 자유로운 듯 자유롭지 않게 중국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봉쇄라는 단어를 처음 듣게 된 것은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2022년 4월 중순이었다. 봉쇄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고, 한국에서는 듣기 힘든 단어라 그런지 일부 뉴스에서 상해의 확진자 수 감소를 위해 도시 봉쇄를 한다고 보도했을 때는 하루 이틀 혹은 길어도 일주일 정도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상황은 심각했고, 매일 500명 이상의 확진 자가 나오자 봉쇄는 기약 없이 길어졌다. 상해에 거주하고 있는 유학생, 직장인, 교민들의 이야기도 주변에서 조금씩 전해졌고, 북경에서도 상해로 보내줄 구호물자를 조금씩 모으기도 하였다. 당시 상해에 거주했던 지인은 갖고 있던 물자가 끊기자 아파트에서 나눠주는 브로콜리 3개로 하루를 버틴다고 하였고, 제 때 기저 질환을 치료하지 못해 지병이 악화했다는 교민의 소식을 듣기도 하였다. 한국까지 보도가 되지는 않았지만 상해 외에도 동베이 지역과 광둥 성의 일부 도시에서도 도시 봉쇄를 하고 있었고, 북경에 사는 나도 긴장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북경 내에서도 조금씩 확진 자 수가 증가하고 있었고, 학교에서도 외출 신청 조건이 점점 까다로워지면서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의 2차 파동이 시작됨을 조금씩 체감하였다. 


과학 방역의 허점

나 역시 밀접 접촉자로 분류가 된 적이 있었다.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학교 밖 건물에 들어갔다가 확진 자와 동선이 겹쳐 밀접 접촉자로 분류가 되었다. 하지만, 해당 장소를 방문한 후인 3주가 지나서야 살고 있는 지역구에서 전화가 왔고, 규정에 따라 전화를 받은 2시간 이내로 직접 교내 밀접 접촉 자 격리 시설로 끌려가게 되었다. 실제로 밀접 접촉자가 방문한 가게나 동선이 동일하지 않아서 격리해야 하는 이유를 끝까지 찾지 못했지만, 보여주기 식 방역 규정에 외국인이 가타부타할 수 없었다. 내가 격리를 하던 곳은 학교에서 버려진 기숙사였고, 문조차 잠글 수 없는 곳이었다. 격리 중이었지만 하루에 한 번 학교 병원으로 직접 외출해서 핵산 검사를 해야 했다. 다행히 3일을 채우고, 핵산 검사에서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격리에서 풀려날 수 있었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당시 북경의 코로나바이러스 확진 자가 매일 50명 남짓 나오는 상황이었고, 9월에 있을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의식해서인지 미연의 확산을 위해 북경의 일부 아파트, 학교에서는 봉쇄와 해제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점점 북경도 상해처럼 도시 전체 봉쇄를 할 것이라는 가십이 돌자 학교 주변의 모든 마트, 슈퍼에서 진정한 ‘사재기’가 시작되고 물류 배달이 중단되었다. 누구도 소문의 사실여부를 가릴 수 없었기 때문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모두 기숙사 문 앞에 물자를 조금씩 모아두었고, 예상대로 1~2일 후에 학교 교문이 폐쇄되고 학생들이 밖으로 탈출할 수 없도록 철조망을 치는 등 지독한 봉쇄가 시작되었다. 


Let’s  봉쇄를 맛보다 

润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润의 독음이 영어로 run이기 때문에 ‘도망가다’라는 의미로 인터넷에서 쓰인다. 2022년 4월 말부터 시작된 봉쇄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학생들은 기약 없는 학교 개방만을 학생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5월에는 노동절이라는 긴 연휴가 있어 여행을 가거나 오랜만에 고향에 방문하는 것을 기다렸지만 노동절에도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매일 탈출과 해방을 기약하며 살아갔지만, 학교 밖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심해졌고, 학교에 있는 우리의 목도 조금씩 죄여 들어갔다. 외주 하는 친구들은 배달 기사들이 길거리에 점차 줄어들자 배달도 시켜 먹기 힘든 상황이 되었고, 학교에서 배달원을 통한 감염을 우려해서인지 배달 물자가 끊겨 기본적인 생필품은 학교의 작은 구멍가게를 통해 의존해야 했다. 은행, 통신사 직원들도 대면 출근하는 횟수가 줄었고, 일부 학식당은 문을 닫게 되었다.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넘게 지났는데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거짓 뉴스만 쏟아져 나와서 우울감을 호소하거나 피로감을 느끼는 친구들도 많았다.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 온 유학 생활에 기숙사와 학교에만 갇혀 있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였고, 수업마저 전면 온라인으로 진행되자 중도 휴학을 하는 유학생도 늘어났다. 

사재기를 하는 북경시민들

기약 없는 봉쇄에 싫증이 난 학기 말 즈음에, 나 역시 학교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하였다. 물론 학교를 떠나는 선택 역시 쉽지 않았다. 학교가 전면 봉쇄를 한다는 뜻은 학생들이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다는 의미였다. 학교 규정이 엄격했기 때문에 교문 근처만 가도 학생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보안관이 많았고,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없었지만, 지도 교수님의 배려로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두 달 만에 학교 밖으로 나가서 본 베이징은 유령 도시 그 자체였다. 길거리에 사람 한 명 없었고, 공항으로 가는 도로에서 달리는 차도 내가 탄 택시 한 대뿐이었다. 북경으로 가는 직행 표마저 사라져 샤먼을 경유해서 장정 19시간 끝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한국에 도착한 그 순간까지 긴장을 놓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식당 내 취식이 모두 금지되고 구호 도시락을 공급했다는 이야기를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봉쇄 소동이 있고 두 달 후인 7월 1일, 학교도 다시 개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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