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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벋음씀바귀의 화양연화

- 벋음씀바귀

by 나우시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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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마다 돌아오는 정기 점진을 받으러 병원을 향해 집을 나섭니다.

아파트 밖으로 나가는 계단 위에는 노란 은행잎과 발그레한 중국단풍나무의 잎사귀들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습니다. 두 가지 색이 어울려 너무도 곱습니다.


내 몸의 일부를 열어 낯선 이에게 보인다는 것에 여전히 익숙하지 않고 때로는 굴욕감까지 느껴지는 것을 보면 아직은 건강한가 보다고 혼잣소리를 하며 헛웃음을 날려 봅니다. 그러나 새로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검사를 받을 때에도 별 생각이 없고 그저 귀찮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요즘은 왠지 마음이 뒤숭숭하고 여러 가지 상상도 하게 되네요. 만에 하나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어쩌지? 가족들에게는 바로 알려야 하나? 하필 지금은 아이들이 너무 힘든 시기인데... 검사를 받으며 나름대로 짧은 소설 한 편을 다 써 내려갑니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서른 살까지만 살아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한 탓이겠지요. 더 이상 신나고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남아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화양연화 시절, 노력만 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암울하기 그지없었던 그 때, 삶의 무게는 무게대로 지고 있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큰 꿈을 꾸고,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자만이었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자포자기나 절망이 아니라 꿈틀대는 희망이 남아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다 가족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면서부터는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내 책임이 된 것이니 소망하는(?) 죽음의 시각도 뒤로 뒤로 물러났습니다. 이제는 아주 다른 마음입니다. 삶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기에 소망도 내 것이 아니고, 죽음마저도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건강한 삶을 위해 검진을 받으면서 죽음을 생각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머쓱합니다. 그러나 생각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를 수도 있으니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상념들을 지울 수도 없네요.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가로수가 심긴 자그마한 공간에서 한 무더기의 어여쁜 꽃을 발견합니다. 아, 너무 예쁩니다!

나지막한 키, 풍성한 잎사귀, 모여 핀 한 무더기의 꽃... 늦가을에 받아 든 이 선물 앞에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습니다. 작은 부케와도 같은 꽃, ‘벋음씀바귀’입니다.


비슷한 두 꽃 노랑선씀바귀와 고들빼기에 대해서는 이미 ‘고들빼기’ 항목에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주로 잎이 줄기에 달린 모양을 중심으로 이 두 꽃을 구분하는 가장 쉬운 기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만, 또 다른 씀바귀가 등장했으니 조금 더 덧붙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잎자루가 줄기를 완전히 감싸고 있는 모양이며 잎 가장자리가 많이 갈라져서 날카롭게 보이거나 톱니가 있고 끝이 대체로 뾰족한 것은 고들빼기입니다. 이에 비해 노랑선씀바귀의 잎은 주로 피침형이고, 벋음씀바귀의 잎은 긴 타원형 또는 도피침형입니다. 굳이 잎의 모양을 이렇게 자세히 설명하는 까닭은 ‘피침형’과 ‘도피침형’이라는 용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식물도감의 설명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용어라서 말입니다.


그림을 통해 피침형과 도피침형을 구분해 보도록 하지요.

이미지와 설명 모두 국립수목원에서 제공하는 <알기 쉽게 정리한 식물용어>에서 빌어 왔습니다.


* 피침형 - 창모양으로 밑으로부터 1/3 정도 부분의 폭이 가장 넓은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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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피침형 (거꿀피침모양) - 피침형이 뒤집힌 모양, 끝에서 밑부분을 향해 좁아지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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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자체가 다른 고들빼기야 말할 것도 없지만 씀바귀라는 이름이 붙은 식물들도 알고 보면 종(種)만 다른 것이 아니라 아예 속(屬) 자체가 다른 식물들입니다. (계-문-강-목-과-속-종의 범주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세요!) 예를 들면 씀바귀는 씀바귀속에 속하며, 노랑선씀바귀는 선씀바귀속 그리고 벋음씀바귀는 벋음씀바귀속의 식물입니다. 서로 다른 점도 상당히 많다는 뜻이 되지요. 그런 점도 염두에 두면서 각 식물들의 특징을 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쨌거나 벋음씀바귀는 꽃잎의 수도 비교적 많고 꽃도 큰 편이어서 참 멋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눈에는 이 벋음씀바귀가 가장 멋지게 보이네요. 물론 나 개인의 취향입니다.

‘벋음’이라는 이름은 뿌리가 옆으로 뻗으면서 마디에서 싹이 나와 번식을 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하며, 이처럼 뿌리로 번식을 하기 때문에 커다란 포기를 이루어 자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는 봄에 꽃피는 식물이라고 소개가 되어 있지만 이 가을에까지도 예쁜 꽃을 보여주고 있네요. 3번과 4번 사진은 며칠 전 햇살이 따스한 시간에 산보를 나가서 찍은 사진인데, 가을에 피어 난 만큼 배경의 단풍과 어울려 그 미모가 한층 더 돋보입니다.


이왕 찍어 온 사진이니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며 꽃의 특징에 대해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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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접사 하여 보니 혀꽃의 숫자가 제법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운데가 꽃술이지요. 꽃술 윗부분의 두 갈래로 갈라진 것은 암술이고 아래쪽의 갈색 부분에 꽃밥이 들어있습니다. 이 중 하나를 뽑아 도식화해서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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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음 모인꽃싸개(총포)를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2중으로 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안쪽의 것이 바깥쪽의 그것에 비해 3배 정도 길다는 것이 벋음씀바귀의 중요 특징이라고 합니다. 국화과 꽃을 구별할 때는 이 총포의 모양과 구성이 아주 중요한 포인트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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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점점 사라져 가는 이 가을에 이처럼 싱싱하고 풍성한 꽃을 본 것이 참 기뻤고, 특히 1번 꽃은 그 아담하고 귀여운 모습 때문에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특별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보려면 1년을 기다려야 하고 그나마 내년에는 같은 모습의 꽃을 볼 수 없을지도 몰라 다음날 다시 꽃을 찾아 나갑니다.

이리 보고 또 저리 봅니다. 춘향가의 한 대목 생각이 나서 혼자 웃습니다.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빵긋 웃어라 입속을 보자.

아매도 내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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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다른 장소에서 피어난 이 아이는 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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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고 자라고 소멸하는 것은 생명체의 숙명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그 과정 중 어떤 한순간 가장 아름다운 그 순간에 내가 그 꽃을 볼 수 있음은 순전한 우연입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만남이라면 그것은 우연에 또 다른 우연이 겹치는 기적 같은 순간입니다. 벋음씀바귀의 화양연화와 마주친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요!

그 짧고도 아름다운 순간, 아니 짧아서 더욱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히 고정시키고 싶어 사진을 찍지만 사실 ‘하나의 모습에 고정됨’은 생명체의 본질에 부합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들어 가는 추레한 모습과 썩어가는 모습까지를 받아들여야 온전한 사랑도 완성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봄꽃인 주제(?)에 이토록 아름다운 꽃을 피워 올린 벋음씀바귀 때문에 놀랍고도 행복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크랙 정원의 꽃들에 눈길과 마음을 주고난 후에는 ‘자연스럽다.’는, 그 경계가 흐려짐을 느낍니다. 도감에 쓰인 내용을 뛰어넘는 꽃들이 참으로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5월의 꽃이 11월에 피는 것, 올해의 가을이 유난히 따스했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은 합니다만 고정되지 않는 생명 현상의 유연함과 가소성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가을에 피어난 아름다운 벋음씀바귀를 만나고 나서 내게도 화양연화가 있었음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시간들... 감히 이 나이에 다시 한 번의 그런 시절을 꿈꾸지는 않습니다. 나는 벋음씀바귀도 아니고 또 조금은 철이 들었으니까요.

이제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자연스럽다.’는 것의 경계가 어디인지조차 불분명한 요즘, 생각은 많아지고 고민도 깊어갑니다. 말하자면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아 죽음에 이르는 시간을 연장하고 있는 현대인 중 한 사람인 나, 두 번째의 화양연화를 꿈꾸기보다는 조금 멀게 느껴지긴 하지만 자연의 한 과정으로서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가는 죽어갔지만, 삶의 모습에 모범 답안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 그것은 객관식 문항도 아닙니다. 서술형 문제, 길게 깊게 생각해 보고 올바른 답을 찾아야 할까 봅니다.


올해 안에 또 대장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건강보험공단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매년 받아야 하는 게 번거로워서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곁의 가족들이 걱정을 하겠지요? 내 몸뚱이,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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