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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시카 9시간전

작은 풀씨의 기억, 세상을 바꾸는 힘

                                   - 개쑥갓









2, 3일 날씨가 바짝 춥더니 거리에 떨어져 누운 낙엽의 두께가 제법 무겁게 느껴집니다. 오가는 발걸음에 밟혀 형태를 잃고 바스러진 낙엽도 자주 눈에 띕니다. 낙엽을 치우는 손길도 부산스럽습니다. 몇 년 전부터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비질을 하는 손길보다는 낙엽 치우는 기계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습니다. 떨어진 낙엽을 치우며 비질하는 소리, 모인 낙엽을 태우는 냄새... 그 모습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어서인지 천둥 같은 소리로 매연을 뿜어내며 낙엽 치우는 기계소리를 들으면 가을날의 낭만은 여지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봄과 여름을 지내며 도시의 거리에 한 뼘의 청량한 공간을 만들어주었던 그 사랑스러운 이파리들이 영락없는 쓰레기가 되는 기분이 듭니다. 도시에 나무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낙엽의 양도 만만치 않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소음에 섞인 얼마쯤의 긍정적인 변화도 인정해야겠지요? 아날로그적 삶에 대한 향수는 이처럼 낙엽 치우는 방법에 대한 감정적 대응 하나에도 끈질기게 남아있습니다. 향수와 현대적인 효율성 사이에서 아직도 갈팡질팡하며 살아가는 우리 세대의 모습, 나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겠지요.

한 포기의 풀에서 위안을 찾고 행복해지는 내 마음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자연의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힘에 공포를 느끼고 그것을 제어하고 싶은 욕망도 지극히 인간다운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에 대한 양가감정... 보면 지긋지긋하고 안 보면 보고 싶은, 뭔가 익숙한 감정입니다.  



이제 막 공사를 끝내고 새롭게 단장한 동네의 작은 공원 가장자리에서 꽃을 피운 ‘개쑥갓’(1, 2, 3번 사진)을 발견합니다. 원래 그곳에서 살고 있었던 녀석인지 혹은 공사장을 드나드는 차량이나 사람들을 따라 새로 이곳으로 와 자리를 잡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난히도 거칠어 보이는 장소에 자리 잡아 꽃 피운 모습을 보니 대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 식물의 놀라운 생명력에 관한 기록은 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도 찾을 수가 있습니다. 


“폐허가 된 카운터 뒤쪽에 투실라고 파르파라(관동화)와 세네시오 불가리스 등 여러 풀포기가, 그런 식물이 생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조건보다 어둡고 건조한 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어반 정글, 벤 윌슨 지음, 박선령 옮김, 매일경제출판사) 


1942년 독일의 대규모 공습으로 초토화된 런던을 탐사하면서 식물학자인 잡 에드워드 루슬리가 남긴 기록입니다. 여기서 세네시오 불가리스가 바로 개쑥갓의 학명입니다. 그런 폐허 속에서도 꽃을 피웠던 식물인데 그에 비하면 이곳의 환경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요?  


종소명인 불가리스 (vulgaris)의 의미도 보통, 통상적인이라는 의미라고 하니 그만큼 흔하고 그만큼 널리 퍼져 자라는 강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이라는 의미가 되겠네요. 사족이겠지만 속명 세네치오(Senecio)는 나이 든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다는데 생각해 보면 아마도 열매의 이미지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이제 막 떨어져 나오고 있는 열매에 달린 흰색의 털이 마치 노인의 흰머리를 연상시켰겠지요. 


이왕 꽃 접사 사진을 보았으니 잠시 꽃에 대해 살펴봅니다. 

딱 봐도 국화과 식물이지요.

그런데 혀꽃(설상화)은 없고 오직 대롱꽃(관상화)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 그 대롱꽃의 꽃부리가 다섯 갈래로 갈라진 것도 볼 수 있네요. 그러나 도감의 설명에 의하면 때로는 혀꽃도 보인다고 하니 100% 믿으면 안 됩니다. 삐죽하게 튀어나온 꽃술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처음의 사진으로 돌아가 봅니다.

대롱꽃으로만 이루어진 머리모양꽃차례의 꽃들이 원줄기나 가지의 끝에 산방모양으로 달려 있습니다. 여기서 ‘큰꿩의비름’ 편에서 설명했던 ‘산방모양’을 다시 한번 불러내 봅시다. 


      

아래쪽 꽃줄기는 길고 위로 갈수록 짧아져서 윗부분에 꽃이 넓게 펼쳐진 모양을 말합니다. 적은 수의 꽃으로 많은 꽃이 핀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가 있는 것이지요.  


개쑥갓에게는 유난히 눈길을 끄는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원기둥 모양으로 길쭉하게 보이는 모인꽃싸개(총포)가 있고, 밑에는 끝이 검은 작은꽃싸개잎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 작은꽃싸개잎이 긴 총포를 다시 한번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는 형상입니다. 마치 지워지지 않는 점처럼, 얼룩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이름이 쑥갓인 이유는 짐작하겠지만 그 잎사귀가 쑥갓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입니다만 쑥갓은 쑥갓속에 속하는 식물이고 이 개쑥갓은 금방망이속의 식물이어서 촌수가 다소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쑥갓은 농사를 짓는 분들에게는 아주 골치 아픈 잡초인지 인터넷을 찾아보면 이 식물을 방제하는 방법과 경고가 눈에 띕니다. 



9월 말부터 발생해 이듬해 4~5월 열매를 맺으며, 민들레처럼 씨앗에 털이 있어 바람에 잘 퍼집니다. 개쑥갓이 농가에 발생하면 수확량을 감소시키고 기계 수확을 방해하거나 흰가루병을 퍼뜨리기도 합니다.... (중략)... 개쑥갓은 제초제에 의해 죽으면서도 씨앗을 퍼뜨리기 때문에, 꽃이 피기 전 비선택성 제초제를 뿌려야 합니다. 연중 꽃이 피는 습성으로 발견되면 즉시 방제에 나서는 것이 좋습니다.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ong-up&logNo=221663987542) 


 

이 글의 제목도 ‘겨울철 작물 재배 땐 잡초 '개쑥갓' 주의하세요... 꽃이 피기 전에 방제해야 효과적입니다.’입니다. 겨울철에조차 꽃을 피우는 질긴 생명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농사일을 방해하는 끈질긴 훼방꾼, 허락도 없이 도시에 나타나서 1년 내내 꽃을 피우고 흰머리의 열매를 날리는 부지런한 노숙자... 개쑥갓의 이미지입니다.  



이번에는 개쑥갓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지구 환경이 항상 지금과 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늘 변화하고 때로는 극단적으로 변해서 생명들이 살기 어려워지기도 했지요. 특히 길었던 빙하기가 끝나 빙하들이 후퇴하기 시작했을 때, 식물들에게 남겨진 땅은 빙하가 물러나면서 생긴 진흙과 모래, 자갈과 바위투성이의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식물들은 이런 환경에서도 살아남아 번성했습니다. 어쩌면 개쑥갓의 기억 속에도 이런 경험이 새겨져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21세기, 도시환경은 염분과 돌멩이가 많고 산성화 되어 있습니다. 건조하고 물이 잘 스며들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다져져 있습니다. 오염은 심각하고 온도는 터무니없이 높습니다. 재난 상황이지요. 이런 환경 변화 속에서는 응석받이로 자란 원예종은 말할 것도 없고 잠잠하게 살아가던 토착 식물들까지도 점차 사라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역전의 용사들이 등장합니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개쑥갓의 씨앗 하나, 공습으로 완전히 망가져 콘크리트 무더기로 변한 런던과 만났을 때에도, 또 콘크리트 아파트가 빼곡하게 세워진 서울 외곽에 내려앉았을 때에도 녀석은 당황하지 않습니다. 개쑥갓은 사라진 듯했던 먼 옛날 개척의 기억을 찾아냅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시감... ‘아, 이거 내가 알고 있는 환경이네!’ 그 기억에 의존해 개쑥갓은 폐허를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장소로 변모시키며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을 유전자의 힘이라고 해도 좋고, 본능이라 해도 좋고, 뛰어난 적응력이라 불러도 상관없습니다...... 여기까지가 나의 상상력으로 써내려 간 소설입니다.  


인간들은 처음 대도시를 만들었을 때에도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굴더니 자신들이 만들어낸 도시의 환경 앞에서 다시 소란을 떨고 있습니다. 인간들에게는 재난에 가까운 대도시의 환경이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중병의 증상이거나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악몽일지는 몰라도 어떤 식물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식물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보다 훨씬 길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금방 알아챌 수 있지요. 


크랙 정원에는 왜 그렇게 토착 식물보다는 외래식물들이 많은지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살아온 환경이 온통 망가진 도시에서는 토착식물들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겠지요. 말하자면 토착식물들은 귀하게 자란 귀둥이들, 이렇게 바뀌어 버린 척박한 환경에서는 개척의 먼 기억을 가진 식물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들의 개척 정신이 투철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경험해 본 적 있는 기억이 있기 때문이지요. 


식물들은 그리고 동물들도 도시라는 환경에 쓸데없는 서사(敍事)를 덧붙이지 않습니다. 도시는 생명의 긴 역사 속에서 최근에야 만들어진 인간들을 위한 집단 서식지이지요. 특이하기는 하지만 긴 세월을 적응하면서 살아왔을 그들에게는 그냥 또 다른 하나의 환경, 도전일 뿐입니다. 수 억 년의 시간 동안 그래왔듯 그들은 다시 적응하고 개척하고 변모시켜 갑니다. 묵묵히...  


내 조상이 된 종(種)마저 아직 이 행성에 나타나기 전, 오랜 세월 속에서 모든 것을 경험해 왔던 작은 씨앗 하나가 보여주는 기적을 지금 나는 눈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공원을 만드느라 부순 돌멩이 속에 뿌리를 내리고 그들은 지금도 곱고 포근한 흙을 만드는 중입니다. 언젠가 돌멩이들은 흙이 되고 그 흙에는 다시 다른 식물들이 피어날 것입니다. 인간이 사라진 후에도 길게 살아남고 피어나서 저 햇빛이 있는 한 이 행성을 푸르게 감싸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 내게 바쁜 일정에 매인 시간들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그 빈 시간 속에 주저앉아 앞으로 내게 남은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동시에 때때로, 아니 자주 옛 기억을 소환하곤 합니다. 좋았던 기억만 있는 것도, 그렇다고 나빴던 기억들만 떠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 그 나빴던 기억은 트라우마가 되어 분명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인데도 과민 반응을 하게 만들고, 또 상처를 덧나게 하기도 합니다. 나는 그저 지나간 시간들을 왜곡하지 않고, 특히 스스로를 미화하지 않고 냉정하게 되짚어 볼 수 있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그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자기애’, 언제나 흥건하게 내 주위를 싸고 있는 변명의 웅덩이, 종종 나의 지옥이 되는 타인들... 다만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정직한 기억이 남은 시간 동안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를 바라봅니다.  



어떤 기억은 인간을 나약하고 사악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또 어떤 기억은 나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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