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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애기들, 재잘대는 소풍

- 꽃다지

by 나우시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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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모님 제사를 지내러 큰집에 다녀왔습니다.

시댁이 저 남녘의 거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는 거리상의 어려움에다가 직장생활을 해야 했던 내게는 꽤나 버거웠던 제사, 각종 집안 행사들...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건만 그 누구에게서도 칭찬이나 공감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열패감은 아직 내 마음 깊숙이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그랬던 시간은 이제 지나갔습니다. 시대의 보편적 정서를 넘어선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좋았던 것이든 아팠던 것이든 이제는 이미 바뀔 수 없는 시간들, 아쉬움은 지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그래서 이번의 여정을 ‘제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즐거운 ‘봄나들이’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좋은 계절이었습니다. 저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빗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보는 울긋불긋 다채로운 풍광에 마음은 한결 가벼웠습니다. 고맙게도 모든 준비를 혼자 해 준 손위동서에게 미안한 마음 반, 고마운 마음 반의 감정이 드는 것도 세월의 힘이 준 큰 위안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새로운 느낌으로 돌아보았던 곳은 집안의 선산이었습니다. 조상님들의 산소를 한 기(基) 한 기(基)를 돌며 성묘를 하면서 남편이 느낄 감정과 그 마음에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또 10대(代)도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핏줄의 역사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설명하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원초적인 인간의 욕망, 영원한 삶이라는 생물학적 본능과 함께 인간 세상에서 죽음은 결코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할아버지들의 산소 옆에 나란히 솟은 할머님들의 무덤은 그런 자연스러운 영생에의 욕망이 남성 위주로만 엮어진 것이 아니냐는 날카로운 반발심을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습니다. 살아생전 그분들 모두 수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남은 것은 나란히 선 두 개의 무덤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어찌되었든 그 모든 비판적 상념들, 날카롭던 내 마음이 이제 많이 무디어지고 심지어 사라지게 된 것은 삶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탓일까요, 아니면 삶에서 더 아프고 더 간절한 것들에 비하면 그런 사실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탓일까요?


올라오는 길에는 가까운 ‘밀양’에 들러 40년 세월 숱하게 오갔으나 그저 스쳐 지나치기만 했던 ‘수산제’도 둘러보았고, 내친 김에 ‘표충사’와 통도사의 말사(末寺)인 ‘만어사(萬魚寺)’에도 들러 그야말로 행복한 봄 소풍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만어사의 만(萬) 마리 물고기를 의미한다는 돌덩이들이 만들어 내는 풍경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검은 암석 무더기 사이에 피어있는 진달래 색이 너무 고와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소위 ‘소원의 돌’ 앞에 모여 있었습니다만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륵전에 부처님 형상 대신 모신 큰 돌덩이였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여인인지라 그 돌의 끝자락을 붙들고 남에게 소리 내어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내게는 간절한 소원을 빌고 또 빌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봄나들이 내내 내딛는 발걸음마다에서 냉이, 꽃다지, 제비꽃, 광대나물, 양지꽃, 살갈퀴 등의 꽃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꽃들은 우리 땅 어디에서나 이렇게 피어나 따사롭고 평화로운 봄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인간 세상의 일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이런 작은 봄꽃들이 내 삶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선산의 무덤가에 피어나있던 제비꽃, 그리고 꽃다지들... 나의 위태로운 상상과는 무관하게 수많은 무덤 앞에 옹기종기 피어난 우리 땅의 소박한 그 꽃들은 죽음의 땅까지도 다정하게 꾸며주고 있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죽은 자들은 죽었으되 결코 완전히 잊히고, 그리하여 무의미나 공(空)으로 사라진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을지...


1박 2일의 짧은 일정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다시 도시의 시간입니다.

봄꽃의 시간은 숨 가쁩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도시 거리를 가득 채웠던 냉이들이 많은 부분 ‘말냉이’로 바뀌고 있었고, 냉이의 흰 꽃들과 어울려 노란색의 꽃다지들이 자잘 자잘 피어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노랗다는 것만 제외하면 냉이의 꽃과 크게 구별되지도 않는 작디작은 꽃입니다. 그렇지만 그 작은 꽃을 바라보는 느낌은 사뭇 다릅니다. 사랑스러움은 몇 배이고, 그래서 바라보는 마음도 또한 따뜻합니다. 애틋합니다. 대견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꽃들이 닥지닥지 붙어서 한 뭉텅이처럼 피어납니다. 꽃들이 닥지닥지 붙어 피기에 ‘꽃다지’가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 꽃은 ‘코딱지나물’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도 작고 보잘 것이 없어서 코딱지 같은 작은 꽃이라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코딱지가 꽃다지로... ‘코딱지’라는 것이 당시의 민중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것이었는지 우리의 야생화 가운데는 코딱지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꽃은 단연 ‘광대나물’입니다만 지역에 따라서는 이 꽃다지도 코딱지나물로 불렸다고 합니다.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꽃다지를 ‘꽃+아지’로 본다는 것이지요. ‘~아지’라는 접미사가 송아지나 망아지처럼 본래의 것보다 작은 것에 붙여진 것과 마찬가지로 꽃다지도 아주 작은 꽃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지요. 꽃다지의 작은 모양새에 주목한 해설로 보입니다.

재미는 조금 덜 하지만 보다 권위 있는(?) 해설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본래 다지는 오이나 가지 따위의 맨 처음 열린 열매를 말하므로 꽃다지라는 이름 속에는 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는 뜻도 들어 있다. 아직 꽁꽁 언 땅에서 연둣빛 줄기가 나와 이른 봄에 성급할 정도로 빨리 꽃이 핀다. 생명의 놀라운 힘을 우리에게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하다.

* 다음백과 ‘꽃다지’ 항목에서 인용

이런 해설은 꽃다지가 피는 시기에 주목한 것이지요. 실제로 꽃다지는 남부 지방에서는 2월 말부터, 중부지방에서는 3월 중하순부터 피기 시작하여 4월이면 온 세상에 곱디곱게 깔리듯 피어납니다.

역시 냉이와 마찬가지로 어린순은 나물로도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꽃다지의 꽃이 피어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봄이 오는 것이고, 길었던 겨울의 추위도, 배고픈 밤의 기억도 뒤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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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찍은 것 중 내가 매우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입니다. 사진을 흘낏 바라보기만 해도 그냥 ‘봄’입니다. 행복한 ‘봄’, 귀여운 아가들이 봄 소풍을 나온 듯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그런 풍경입니다. 크랙 정원에 피어난 꽃이 아니기에 참고로만 올립니다. 다만 이 사진에서 보면 크랙 정원에서 찍은 위의 사진들에 비해 줄기도 꽃차례의 길이도 긴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더 뒤에 찍은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처음 나올 때는 키도 작고 꽃차례도 짧지만 광합성을 해 가면서 이 꽃들도 몸체를 키워가는 탓이지요. 분홍빛 복숭아꽃, 살구꽃이 핀 저 너머 마을을 배경으로 피어난 꽃다지의 무리가 어여쁩니다.

꽃다지와 냉이는 같은 십자화과의 식물이면서 피는 시기가 비슷해서인지 이 두 소박한 꽃이 서로 어울려 함께 피어있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작은 꽃은 우리들의 ‘가난한’ 봄, 그러나 ‘다시 희망에 찬’ 봄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법 풍성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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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의 사진은 며칠 사이 부쩍 큰 크랙 정원의 꽃다지 모습입니다. 아이처럼 돌보아주지 않아도 홀로 씩씩하게 자라나 열매를 맺고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냉이와 마찬가지로 꽃다지도 몸체에 털이 빼곡합니다. 이른 봄에 피어나기에 아직 다 물러가지 못한 겨울의 남은 추위가 걱정되어서 일까요?


그러나 ‘냉이’ 글에서도 말했지만 이 두 꽃의 큰 차이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열매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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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의 사진을 통해서는 몸체 전체에 난 털을 확인할 수 있고, 아래쪽의 사진을 보면 열매의 모습이 보입니다. 냉이의 열매가 가운데가 쏙 들어간 역삼각형 모양인데 비해 꽃다지의 열매는 긴 타원형임을 확인할 수 있네요.


거실의 창밖으로 보이는 배나무 과수원 배나무에 며칠 사이 꽃을 활짝 피워났습니다. 도시 안의 아파트에서 누리는 호사 중 하나였는데 올해 그 과수원을 없애버리고 공원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배나무들을 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네요.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 여느 해 배나무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위로, 옆으로 마구 뻗은 가지 때문인지 그 자유로운 모습이 훨씬 풍성한 느낌을 줍니다. 아마도 사라져 갈 배나무들이 내게 선사해 주는 마지막 큰 선물인 것만 같습니다.

어제는 늦은 밤 산책을 나갔습니다. 보름을 하루 앞둔 밤, 달무리가 끼어 있기는 했지만 잔잔한 달빛 속의 흰 배꽃의 물결이 눈부셨습니다. 낮에 보는 모습과는 다릅니다. 조용한 감동은 한층 깊이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모든 것이 변해갑니다. 변하는 것들 중 어떤 것은 시간의 힘으로, 그리고 견딤의 힘으로 좋아지는 것도 있습니다만 아쉬운 것들, 그 소멸이 가슴 아픈 것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한다 하여 모든 것을 영원히 붙들 수는 없습니다. 그저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아름다움을 충분히 즐기는 것만이 삶의 풍성함을 누리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해 주고, 내가 안고 있는 상처들을 남에게 드러내어 그들의 공감을 억지로 끌어내려 애쓰지 말고 스스로 치유해 가는 조용한 노력이 다른 무엇보다도 더 소중해지는 나이임을 깊이 깨닫습니다.

무덤가 비석에 내 이름이 새겨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살아서 사랑하고, 살아서 사랑받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태어난 것은 우연이었지만 죽는 것이 필연이라면 그 짧은 삶의 시간 속에서, 가난한 기쁨을 만들어주는 저 작은 꽃과 함께 봄날의 소풍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밤 보름달의 달빛이 내려앉은 배 밭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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