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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깨는 모습에 반하다.

- 반하(半夏)

by 나우시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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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떠서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은 나날이 푸르러지고 있습니다. 메말라 황량했던 겨울의 그 뒷동산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제법 울창한 숲의 모습이 새롭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네요. 배꽃이 다 지고 나니 층층나무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바람에 흔들리는 무거운 가지, 그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들의 춤사위가 아침을 평화롭게 열어줍니다. 햇빛 욕심쟁이 층층나무, 마음껏 빛을 받아 안고 있네요. 아침이 이처럼 편안하게 열리는 것이 참으로 좋습니다. 아마도 먼 옛날 숲 속에서 살던 내 조상의 조상님들께도 아침은 이런 모습으로 열렸겠지요.


뇌 과학자들의 이론에 따르자면 인간의 정상 상태는 ‘멍 때리는 상태’라고 합니다. 아무 할 일이 없고 그래서 걱정거리도 없고 그저 현 상태에서 편히 존재하는 것...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나는 왜 이런 ‘할 일이 없는 상태’에서 편하게 있지 못하고 그 상태 자체를 걱정거리로 만드는 것일까요? 비정상인 것이지요? 그렇게 교육받고, 그렇게 살아온 것이 결국은 내 존재의 본성마저 오염시켜 버렸고 그래서 나는 좀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행복불감증 환자가 된 것만 같습니다.


나 자신을 꾸짖다 갑자기 이런 의문도 생겨납니다. 그토록 과각성된 상태로 열심히 살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존재가 되었을까? 내게 부여된 그 많은 역할들을 과연 잘 해낼 수 있었을까? 잘 해내지 못하는 나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힘들지 않았을까?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이란 말인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정답은 없고 의문만 이어지는 꼴입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난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정상이라고 생각해 왔던 많은 것들, 그리고 그 정상인 상태에 이르기 위해 노력해 왔던 시간들이 오히려 내 삶을 힘들게 하고 내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후회에 휩싸일 때도 많습니다.


다시 방 밖을 바라봅니다. 초록의 숲 위로 내려앉은 햇살과 파란 하늘을 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해 봅니다. 현재의 이 고요함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며칠 전 산책길에서 ‘반하(半夏)’ 꽃을 만났습니다.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도시의 한 귀퉁이, 엄밀하게 말한다면 크랙 정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널찍한(?) 아파트 담벼락 바깥쪽의 좁고 옹색한 땅에 이 신기하게 생긴 꽃이 피어있었습니다.


자잘한 도시의 봄꽃에 지친 눈도 쉬어갈 겸, 또 그 생김새부터 무척 특별한 이 꽃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위의 이 꽃 사진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코브라 뱀이 생각나지 않으시나요? 혹은 한 마리의 두루미??

다양한 모습의 꽃들을 보아왔지만 이 ‘반하’야말로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모습의 꽃입니다.


우리나라의 꽃 중에는 동물의 이름이 붙은 것이 꽤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파리풀, 병아리풀, 사마귀풀, 새우난초, 족제비쑥 등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벅찰 정도입니다. 그중에서도 이름과 동물의 생김새가 꼭 어울리는 식물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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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저렇게 꼭 맞는 이름을 붙였는지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이 꽃들을 보는 순간 정상적인 꽃의 생김새는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드네요.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꽃의 ‘정상’과 ‘비정상’적인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꽃의 정상적인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아마도 이런 모습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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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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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꽃>

꽃 모양도 색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꽃!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색도, 꽃과 잎의 모양도 너무 다양합니다. 지금 현재 지구 행성에서 꽃을 피우고 후손을 남기고 있다면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건 매우 성공적인 존재라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은 적어도 생명체의 영역에 있어서는 아주 단순합니다. 생존과 번식에 성공했다면 정상이고 그렇지 못하고 진화의 과정에서 도태되었다면 정상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는 잣대의 대부분은 ‘우연’의 결과였음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가 내게는 길고 어려운 과정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무엇이든 그것을 얻지 못했다면 노력이 부족해서이고 자신의 잘못이기에, 이 세상을 사는 가장 바람직한 길은 설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그 오직 한 길 뿐이라고 길들여져 왔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신념’ 일뿐 ‘진실’은 아니었습니다. 우연이라는 것이 어쩌면 삶에 있어서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가장 강력한 요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내게 겸손하라고 가르칩니다. 결코 노력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면 그것은 행운 때문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지요. 지금에라도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기에 나는 자신이 조금 더 성숙했다고 믿습니다.

서두가 긴데다 곁길로 너무 많이 빠져 버렸네요.

반하라는 꽃을 처음 봤을 때 이 꽃은 너무 특이해서 마치 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꽃이, 이게 꽃인가?’ 이런 놀라움이었지요.

모름지기 꽃에는 암술과 수술이 있고 그것을 둘러싼 아름다운 꽃잎이 있으며, 그들 모두를 받쳐주는 꽃받침이 있어야 온전한 꽃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식물의 생식기관들은 대부분 바깥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런 꽃을 ‘갖춘꽃(완전화)’이라고 합니다. 이런 용어가 있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꽃들도 있다는 얘기겠지요. 그렇습니다. 위의 4 기관 중 하나라도 없다면 그런 꽃은 ‘안갖춘꽃(불완전화)’입니다. 용어가 많이 불편하게 들리지요? 진화의 승리자인 꽃에게 불완전이라니요? 인간들이 만든 용어에서 은근히 내비치는 무지와 오만을 봅니다.



자, 그렇다면 반하의 특별한 모습은 다른 꽃들과 정말 다른 것일까요? 반하는 정말 비정상인 꽃일까요?

반하는 천남성과에 속하는 꽃입니다. 위에서 같은 집안의 두루미천남성을 보여드리기도 했지만, ‘천남성’은 독초로 유명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약의 재료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는 그 꽃입니다. 이렇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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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하와 많이 닮았습니다.

이들의 꽃차례는 ‘육수꽃차례’라고 하는데 그 구조를 간단하게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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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국립수목원, '알기 쉽게 정리한 식물용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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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꽃잎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둥근 보자기 모양의 싸개를 ‘꽃덮개(불염포)’라고 합니다. 꽃덮개는 잎이 변하여 된 것인데 그 안의 꽃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실제로 꽃이라 부를 수 있는 부분은 그 꽃덮개 안에 들어앉아 있습니다. 위의 왼쪽 그림은 꽃덮개 안에 자리 잡은 기둥 모양의 꽃이삭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른쪽 그림은 그것을 간략하게 도식화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마치 도깨비방망이 같은 모양이지요.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반하의 경우는 오른쪽 그림의 동그라미 하나하나가 암술이나 수술이 아니라 한 송이의 꽃이라는 사실입니다. 두꺼운 방망이에 꽃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형태입니다. 꽃자루가 없기 때문이지요. 반하의 꽃덮개 위로 채찍처럼 길게 뻗어 나온 부분은 바로 이 꽃차례의 끝부분이 길어져서 만들어진 부속품입니다.

전체적인 구조를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꽃을 자세히 살펴볼 차례입니다.

반하의 암꽃과 수꽃을 보려면 어쩔 수 없이 꽃덮개를 열어보아야 합니다.

꽃을 훼손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실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만, 바로 알아야 오래 사랑할 수 있다고 믿기에 꽃차례 하나를 갈라서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구차한 변명 같지만 반하는 희귀식물은 아니고 또 번식도 잘 되는 식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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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덮개 안쪽의 모습을 가로로 눕혀 확대해 본 것입니다. 바로 세운 모습으로 생각해 보면 아래쪽에 암꽃들이 있고, 그 위쪽에 수꽃들이 있는 것이지요. 암꽃에 높이 솟아오른 암술대들이 우뚝우뚝 정렬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수꽃들은 수술대가 없이 바로 꽃밥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반하는 이처럼 암수꽃이 한 포기에 같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문제가 생길 수가 있겠네요. 즉 위쪽의 수꽃에서 꽃밥이 아래쪽 암꽃의 암술머리에 내려앉으면 제꽃가루받이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건 문제가 아닐 수 없네요. 어떻게 해결해 왔을까가 몹시 궁금해집니다. 자료를 찾아봐도 반하의 꽃가루받이에 대한 것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암꽃이 수꽃의 아래에 자리 잡은 것으로 미루어 보면, 아마도 암술과 수술이 성숙되는 시기를 달리해 제꽃가루받이를 피하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즉 암꽃에 있는 암술이 먼저 성숙해서 곤충들이 다른 꽃에서 묻혀 온 꽃가루로 꽃가루받이를 끝내고 난 후, 뒤늦게 수술이 꽃밥을 터뜨려 다른 꽃의 꽃가루받이에 사용하거나, 반대로 수술에서 터져 나온 꽃가루를 다른 꽃들의 꽃가루받이에 다 사용하고 난 후 비로소 암꽃의 암술머리가 뒤늦게 성숙해서 다른 꽃의 꽃가루를 기다리는 방식, 이 같은 자웅이숙의 방법으로 근친교배를 피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얼핏 보면 정말 괴상하게 생긴 이 꽃, 하나하나 뜯어보았더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다만 너무도 소중한 꽃을 꽃덮개로 단단하게 가려 보호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게다가 좁고 긴 꽃덮개 안으로 들어온 곤충들은 나갈 길을 쉬이 찾지 못하고 그 안에서 뱅글뱅글 헤매기 때문에 꽃가루받이를 해줄 시간도 충분히 확보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다른 어떤 꽃들보다 안전하고 단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셈이네요. 그러니 반하는 정상적인 구조를 가진, 완전히 정상적인 꽃입니다.


반하에게는 또 하나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있습니다. 잎사귀의 모양이 그것입니다. 1, 2개 나오는 잎은 다시 세 갈래로 곱게도 갈라지는데 (3출엽) 그 모양이 깔끔하고 단아합니다. 그래서 꽃이 피기 전에라도 이 잎의 모양만 보고도 반하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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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갈라진 잎의 중간에 동그란 구슬을 달고 있는 것도 있다는데 이를 ‘살눈(주아)’이라고 합니다. 살눈은 잎자루나 줄기에도 달릴 수 있다고 하는데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우리 동네의 반하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살눈이 성숙했을 때 떼어내 땅에 묻으면 번식이 이루어진다고 하니 씨앗 이외의 또 다른 번식 방법을 준비해 두고 있는 셈이지요. 여러 가지로 똘똘한 녀석입니다. 반하는 정상적인 꽃일 뿐 아니라 최고로 효율적인 번식전략을 가진 꽃이기도 합니다.

다른 천남성과의 식물들처럼 반하도 그 알뿌리에 독성이 있으니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겠지만 독은 곧 약이 되기도 해서인지 거담, 진해 등의 효능이 있어 한방에서는 약재로 사용됩니다. 참고로 반하(半夏)라는 이름은 여름의 중간 즈음에 덩이줄기를 캐서 말려 사용할 준비를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얼핏 이상하게 보이는 반하, 반하를 정상적인 꽃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나의 문제였네요.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잠시 떠올려 봅니다.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정상이 아닌가는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서 정의되고 결정되는 경우가 꽤나 많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비정상이라는 범주가 어떤 필요에 의해 ‘발명’되거나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또 다른 차원의 의문은 이렇습니다.

지금 이 사회는 과연 정상적인 사회일까요? 만약 사회 자체가 정상이 아니라면 그 사회 속의 한 개인이 정상인인지 아닌지를 어떤 기준으로 판별해야 하는 것일까요?


꽃의 세계에서는 극히 정상적인 꽃인 반하, 그러나 상식을 깨는 놀라운 모습, 더 많이 알고 싶게 만드는 매력, 보는 이들을 자신에게로 바싹 끌어당기는 흡인력... 반하의 살짝 반항적(?)인 모습, 나는 반하에 반하고야 맙니다.

너무 일반적인 것은 때로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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