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뽀리뱅이
집에서 입을 여름 티셔츠 한 장을 사러 동네 마트에 들렀습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저 흰색의 옷, 조금 넉넉한 사이즈로 한 장을 골라 계산을 합니다. ‘적립하시겠어요?’ 친절한 아주머니께서 묻습니다. ‘네!’ 핸드폰 번호를 불러드리고 이름도 알려드립니다. 이름을 듣고 난 아주머니께서 살짝 놀라며 내 얼굴을 쳐다보십니다. 익숙한 반응입니다. ‘이름은 예쁘지요?’ 내 말에 허를 찔린 양 아주머니께서는 서둘러 ‘아니요, 이름도 예쁘시네요!’하며 웃으시네요. 아름다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이 70에 가까운 내 또래의 친구들 이름에 비한다면 너무나 예쁘고 세련된 이름입니다. 멋쟁이 친정아버지께서 예쁘고 우아하게 살라며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러나 나는 평생 그다지 예뻤던 적도 없었고, 또 요즘에야 좀 여유가 생겼다고는 하지만 늘 바빠 종종 대었을 뿐 우아한 생활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바란 적도 없었습니다만 그래도 이토록 예쁜 이름을 지어주신 것에 대해서는 늘 감사하고 있답니다. 가끔 촌스러운(?) 이름 때문에 속상해하는 친구들을 생각한다면 나는 적어도 이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기억은 없으니까요.
러시아 소설에 심취해 있던 학창 시절,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너무도 길고 어려워 늘 헷갈렸던 기억이 납니다. 시간이 꽤 지난 후에야 그들의 작명법을 알게 되었고 그 후로는 어렵지 않게 소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소설 ‘전쟁과 평화’ 속 등장인물의 이름은 다음과 같이 이해됩니다.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볼콘스키 - 볼콘스키 가문의 니콜라이의 아들 안드레이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볼콘스카야 - 볼콘스키 가문의 니콜라이의 딸 마리아
영화 ‘반지의 제왕’이나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보더라도 기사(騎士)가 자신의 이름을 밝힐 때면, 단순히 이름만이 아니라 가문과 아버지의 성함을 함께 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명법은 이름이 가진 이중적인 기능을 보여주는 것 같았거든요.
첫 번째로는 자신의 가문을 밝히는 기능이지요. 가문(姓)과 아버지의 이름을 밝힘으로써 자랑스러운 일족에 속해있음을 상대에게 과시하는 것이지요. 계급사회에서는 아주 중요한 기능이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자식의 이름 안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다면 그런 사실 자체가 부끄럽게 살면 안된다는 당위의 결정적 전제가 되기도 하겠지요. 즉 나쁜 일을 하면 죽은 후 간다는 ‘지옥’이라는 종교적 장치는 이제 자칫 옳지 못한 선택을 하여 그 부끄러운 이름이 후손의 이름 속에 붙박여 버리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지옥이라는 내면적 족쇄로 변주가 된 셈이지요... 이름 하나를 이처럼 다양하고도 중요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짓다니 대단한 발상 같습니다. 물론 현대적 사고에는 맞지 않는 일종의 연좌제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의외로 강력한 이름의 기능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별 상관관계는 없지만 오늘 살펴볼 꽃의 이름이 내게는 상당히 낯설고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는 그런 이름은 아니어서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너무 멀리 와버린 느낌이 드네요. 이쯤에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원래의 꽃 이야기로 돌아가려 합니다.
뽀리뱅이, 봄이 익어가면서 그동안 어떻게 이 녀석을 보지 못하고 넘어갔나 싶게 사방이 뽀리뱅이 천지입니다. 길가에도 크랙 정원에도, 공원에 곱게 심어놓은 철쭉 밭에도... 흙만 보인다면 아니 흙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까지도 이 꽃이 피어있습니다. 환경에 따라서 키가 아주 작은 것부터 내 허리의 반이 넘게 큰 키의 꽃까지 다양한 크기입니다. 꽃의 크기는 작은데 비해 죽 벋은 줄기가 길어서 한편으로는 늘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초식공룡들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이 균형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노란색의 국화과 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꽃이 워낙 작고 볼품이 없다 보니 ‘어머 예뻐라!’ 뭐 이런 감탄사가 나오는 외모도 아닙니다만 뽀리뱅이라는 이름 역시 그리 고급스럽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이 이름은 ‘뽀리’와 ‘뱅이’의 합성어인데, ‘뽀리’는 무엇인가 막 돋아나는 모습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뿔’, ‘뾰족’과 같은 단어와 동일한 어원을 가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뱅이는 무슨 의미일까?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뱅이는 ‘그것을 특성으로 가진 사람이나 사물’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로서 예를 들면 가난뱅이, 게으름뱅이, 주정뱅이처럼 쓰인다고 하네요. 혹시나 비하의 뉘앙스는 없는가 하여 찾아보았으나 특별히 그런 언급은 없었습니다.
뽀리뱅이라는 이름은 이 식물의 줄기가 뾰족한 모양으로 길게 자란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또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를 보면 아주 재미있고 설득력 있는 이름의 유래가 나옵니다. 이 책에 의하면 앉은뱅이(민들레)와는 달리 줄기가 위로 길게 자라 올라 꽃을 피우는 특징이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네요. 앉은뱅이와 뽀리(뾰족)뱅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란색의 꽃, 거기에다 같은 국화과의 꽃, 게다가 이른 봄 식량이 부족했을 때 어린 순을 따다가 먹을 수도 있는 나물들... 땅 위에 납작 붙어 피어나는 앉은뱅이 꽃 민들레에 비해 싱겁게도 훌쩍 긴 줄기 끝에서 조그만 꽃을 피우는 뽀리뱅이, 멋진 대조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유래에 한 표를 던집니다! 내 맘대로 말입니다.
이름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식물의 생김새를 들여다보도록 하지요.
긴 길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늘게 자라는 뽀리뱅이의 줄기는 곧게 서있습니다. 이 줄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체에 고르게 잔털이 있어서 일견 따뜻해 보이기도 하지만 좀 투박하다는 느낌도 들지요. 그리고 뿌리잎과 줄기의 아래 부분에 달리는 줄기잎은 풍성한 치마처럼 제법 무성하게 달리는데다가 깃꼴로 깊숙이 갈라져 있기에 눈에 잘 띕니다.
국화과 식물이기에 머리모양꽃차례를 가졌지만 대롱꽃은 없고 혀꽃만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피는 노랑선씀바귀나 고들빼기의 꽃에 비해서 꽃의 크기는 매우 작습니다. 노랑선씀바귀와 고들빼기 꽃은 그래도 지름이 2㎝ 내외인데, 뽀리뱅이의 꽃은 1㎝가 채 되지 않으니 정말 작은 편이지요. 그래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초식공룡을 보는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지요. 너무 외모 폄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여 살짝 반성해 봅니다. 꽃술은 씀바귀의 그것처럼 검은빛이 돕니다.
이 시기 크랙 정원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꽃들을 꼽아보자면 고들빼기와 노랑선씀바귀, 민들레와 서양민들레, 거기에다가 이 뽀리뱅이까지... 온통 노란 국화과 꽃입니다.
잠깐, 이쯤에서 복습을 겸해서 그들을 구별해 볼까요?
꽃이 비교적 크고 방석처럼 땅바닥에 붙어서 자라나면 민들레와 서양민들레, 그중 꽃을 살짝 뒤집어 보았을 때 바깥쪽 모인꽃싸개잎이 뒤로 젖혀져 있고 그 끝에 돌기가 없다면 서양민들레이고, 뒤로 젖혀지지 않고 끝부분에 작은 돌기가 있다면 민들레입니다.
가는 줄기가 제법 길게 자라나고 노란 꽃이 하늘거리는 꽃 중에서 꽃술이 검은 것은 노랑선씀바귀이고 꽃술이 노랗고 잎이 줄기를 감싸고 있다면 고들빼기입니다. 이 정도만 알고 있어도 크랙 정원에서 피어나는 노란 봄꽃들을 구별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네요.
다른 글에서 민들레와 서양민들레, 그리고 노랑선씀바귀와 고들빼기 이야기는 이미 했으니 궁금하다면 다시 한 번 찾아 읽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도 꽃도 제각기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가능하다면 올바른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 좋겠지요?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야말로 참 ‘사랑’의 출발점이라 믿기에 엄격한 분류학적 기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다는 걸 알면서도 여러 글에서 식물의 이름을 밝히는데 많은 분량을 할당했습니다. 다만 식물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매우 인간적인 행위이기도 하기에 한 가지 기준만이 옳다고 고집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내게는 과학적 분류보다 ‘왜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라는 궁금증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꽃을 ‘내 세상 안에 받아들여’ 그 안에서의 위치를 정해주는 작업이니까요. 내가 이해하고 있는 꽃, 내가 사랑하는 꽃을 나 나름의 기억 속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으로 보아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분류학상의 이름 (예를 들면 학명)을 알아가는 작업과 일반적으로 불리는 이름의 유래에 관심을 갖는다는 일이 나란히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꽃을 몇 장 사진으로 담아놓고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던 지난봄으로부터 시간이 꽤나 흘렀습니다. 봄이 부산하게 지나가고, 정신없이 더웠던 여름을 견디고, 그리고 이제 제대로 깊어가는 가을... 마치 뽀리뱅이라는 존재가 먼 과거의 꽃처럼 기억되는 밤입니다.
지난밤 깊이 잠들지 못하고 결국 새벽에 깨어나 뒤척대기만 했던 탓인지 머리는 종일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하고 마음도 텅 빈 것처럼 공허하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오늘 밤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뒤숭숭한 마음을 다독이다가 문득 몇 년 전에 보았던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너의 이름은’이 생각났습니다. 전체의 이야기와는 무관하게 대도시의 빌딩들 위로 한없이 눈이 내리던 장면이 또렷하게 떠올랐는데, 왜 그런지 그 장면을 다시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혜성의 추락과 충돌로 인해 500명의 사람이 순식간에 사라진 마을, 그 안에서 살았던 소녀가 이야기의 한편에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바쁘게 돌아가는 대도시의 일상 속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한 소년이 있습니다. 두 사람에게 지구로 다가오는 혜성은 너무도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자신을 포함한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의 생명을 앗아가게 되는 대재난의 시작, 다른 한 사람에게는 화려한 볼거리. 그러나 두 사람의 몸이 바뀌고 서로의 체험을 공유하게 되면서 소년에게도 재난은 현실의 일이 됩니다. 둘은 어떻게 해서든 마을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소년의 기억도 차츰 사라져 가지요. 그러나 무언가를 잃은 듯하다는 느낌,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갈망, 충족되지 못한 마음속 공허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소년은 ‘너의 이름’을 기억해 내고 싶어 합니다.
토호쿠 대지진의 기억과 그것을 애도하는 영화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재난은 직접 겪은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도 깊고 깊은 트라우마가 되고, 그러기에 충분한 애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방식의 사회적 재난으로 폭발하기 마련입니다. 어느 사회에서든 자연적인 재난만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재난은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들은 그 재난으로 잃은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을 겪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애도를 표합니다. 충분히, 충분하게 애도해야 합니다. 결코 ‘작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살아남은 나 자신의 아픔과 상처와 죄의식을 치유하는 시간이니까요.
어찌 보면 도시 환경이라는 것은 식물들에게는 재난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강하고 가변적이고 충분한 가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환경에 맞춰 변하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환경 자체를 바꾸기도 합니다. 생명체들은 자신을 변화시켜 생명을 지속해 나가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랙 정원에서 자라나고 꽃 피우는 나의 꽃들도 그런 존재들입니다. 교란된 생태계에서 피어나 시간을 두고 오히려 그 생태계를 안정화시켜 주는 역할까지 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환경에게 오히려 자신의 ‘지속하는 생명’으로 보답하는 존재들. 그래서 이 자잘한 꽃들을 보며 감동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과 나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틀림없이.
인간의 먼 선조가 단세포 생물을 벗어나 몸을 지닌 생명체가 되려 했을 때, 세포들은 새로운 협동 메커니즘을 배워야 했을 것이다. 10억 년 전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세포들은 서로 소통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하고, 새로운 물질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중략>... 세포를 붙이는 접착제, 세포들이 서로 ‘말하는’ 방법, 세포들이 특수한 분자를 만들어내는 것, 이 속성이야말로 지구상의 모든 몸들을 만드는데 필요한 도구상자 속의 핵심 연장이다.
<내 안의 물고기> (닐 슈빈 지음, 김명남 옮김, 김영사)에서 인용
세포 수준에서, 유전자의 수준에서 모든 생명체들은 본능적으로 서로 연결되고 소통하려는 강한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홀로 있기를 간절히 원하는 순간도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끈질기게 다른 사람, 다른 생명체와 연결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고난과 아픔에서 완전히 등 돌리기 어렵습니다. 의도적인 외면과 계산된 무감각은 그것 자체로 폭력입니다. 공감은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다지 예쁘지도 사랑스럽지도, 내게 먹거리가 되어 준적도 없는 꽃 뽀리뱅이... 무한한 시공 속의 티끌 같은 존재인 나도 그 희박한 확률의 바다를 넘어 내게 다가온 ‘너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습니다. 우아하지 않은 이름이라 하더라도 불러주고 싶습니다. 사람이든 꽃이든 그 무엇이든, 지금 현재 나와 함께 있는 모든 존재들의 이름들을 한 번씩 불러주고 싶은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