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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견고한 본질, '살아냄'

- 개갓냉이

by 나우시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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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무수한 소문 속의 그 영화 <브루탈리스트>를 보았습니다. 얼굴만 보아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연기가 일품이었고 내용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실존했던 인물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다 보고 난 후 100% 허구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영화와는 달리 모든 것을 시간의 흐름을 따라 차근차근 친절하게 보여주지 않아서인지 오히려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였고, 당연히 다음에 한 번 더 보아야겠다는, 별로 지켜질 것 같지 않는 약속을 스스로와 했습니다.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그러했겠지만 역시 내게도 두 개의 대사(臺詞)와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하나는‘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은 거짓 없는 진실이다!’입니다.

‘아름다움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는 그것이 진실(眞)되어야 한다.’는 명제와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미(美)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도 생각됩니다.

다른 하나는 왜 하필 건축을 하게 되었느냐는 다소 무례한 질문을 받은 주인공이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육면체를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상적이었다고 해서 내가 위의 두 가지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했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미(美)의 토대가 진(眞)이어야 한다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콘크리트 노출기법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브루탈리즘 건축이 그런 이론에 부합하는 가장 멋진 대응물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고개가 갸웃거려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예술은 그 시대 상황 속에서 이해해 보았을 때 비로소 전체의 모습이 바로 보이는 것이겠지요. 아름다움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을 찾는다는 것이 애초 가능하지 않지만, 적어도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태도와 공부가 내게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가리에서 낙엽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크랙 정원의 꽃들도 점차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시들었다고 하기보다는 꽃과 잎을 떨어뜨리고 마지막 과제, 열매를 맺고 있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맞겠지요. 가끔씩 애기똥풀의 꽃이 선선해진 바람에 잔잔하게 흔들리는 모습도 눈에 띄고, 털별꽃아재비의 자잘한 꽃들은 아직 한창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크랙 정원은 많이 허전해졌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아직 피어있는 꽃은 없나 하여 조금 더 허리를 굽혀 보면 어김없이 아직도 꽃을 피우는 녀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개갓냉이’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늦봄부터 피기 시작한 것 같은데 여름을 지나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꽃을 피워 올리네요. 세상의 빛깔이 초록에서 점차 갈색으로. 그리고 붉은색으로 변해가서인지 이 자그마한 꽃의 노란색이 유난히 눈길을 끌어당깁니다. 그리고 사랑스럽습니다.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개갓냉이라면 원종인 갓냉이가 있는 것일까 궁금하여 <국가생물종목록>을 살펴보았습니다만 그런 식물은 보이지 않고 다만 개갓냉이와 더불어 좀개갓냉이, 가세잎개갓냉이, 그리고 섬개갓냉이 4종만 보입니다.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에 의하면 애초 <조선식물향명집>에서는 이 식물이 갓과 유사하다는 의미에서 ‘개갓’으로 기록했는데 나중에 냉이를 닮았다는 의미가 추가되어 개갓냉이로 변경했다고 하네요. 비로소 그 이름이 이해됩니다.


넉 장의 꽃잎, 십자화과의 꽃으로 보이네요. 접사 하여 자세히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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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은 4장입니다. 꽃받침조각도 4개입니다. 일부 자료(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는 ‘배추과’라고도 분류되어 있지만, <국가생물종목록>에 의하면 십자화과 식물입니다.

암술은 1개, 수술은 6개입니다.


잎은 거의 갈라지지 않았고, 잎 가장자리의 톱니는 다소 불규칙하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잘 보입니다. 이 점이 서로 비슷하여 헷갈리기 쉬운 ‘속속이풀’과의 중요한 차이이기도 합니다. 속속이풀의 잎은 깃꼴로 깊이 갈라집니다. 그리고 개갓냉이의 잎은 아래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래 부분이 좁아져서 마치 잎자루처럼 되어 줄기를 감싸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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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열매입니다. 열매를 접사 하여 보니 다른 냉이 종류의 식물들과 마찬가지로 긴 바늘 모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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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감을 찾아보면 줄기는 가지를 많이 치며 그 길이는 20~50cm까지 자란다고 하는데 크랙 정원에서 자라는 개갓냉이들은 환경이 상대적으로 척박해서인지 대개는 땅에 붙어 나지막하고, 작은 모습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냉이와 크게 차이가 나는 점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단지 꽃의 색이 노랗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띄고 ‘갓’냉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매운맛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그러나 도시의 길거리에서 지저분하게 피어난 그 식물의 잎을 따 먹어볼 엄두를 내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개갓냉이는 키가 20~50cm에 이를 정도로 제법 크게 자라나고, 가지도 많이 치는 식물이랍니다. 그래서인지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보면 ‘이게 정말 내 크랙 정원에 피어난 그 꽃과 같은 꽃이야?’ 할 정도로 당당한 모습입니다. 당연히 꽃도 풍성하고요.

도시의 크랙에 자리 잡고 산다는 것의 어려움이 이 작은 모습에서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런 여건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자신의 영속성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은 거짓 없는 진실이다.’는 명제는 이 식물에게는 이렇게 번역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즉 ‘생명의 견고하고도 아름다운 본질은 어디에서 싹터나 든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과정 그 자체이다.’ 그리고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정육면체를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인 것과 같이 생명의 견고한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크랙 사이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살아 다음 세대로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꽃들이라고요.


자전거 거치대 밑의 좁은 틈새, 하수구의 갈라진 틈, 마트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 잠시 쉬러 나와 담배를 피우고 그 꽁초를 던져 놓은 좁은 주자창의 깨진 아스팔트 사이,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마을 골목의 부서진 시멘트 사이에서도 이 꽃은 피어납니다. 마치 그런 환경이나 여건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 무엇도 나의 삶에 걸림돌이 될 수는 없다는 듯, 담담하나 당찬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꽃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꽃에 관심을 가진 이후 아름답고 귀하고 화려한 꽃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을 만날 때면 경험했던 감동과 흥분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유독 크랙 정원의 꽃들에게서 내가 느끼는 감동은 바로 그런 것 같습니다.

‘삶의 견고한 본질은 복잡하고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자신의 온몸으로 ‘살아내’는 모습, 식물 세계의 브루탈리즘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이제 내 크랙 정원의 문을 닫아야 할 시간임을 예감합니다. 일시적인 것일지 아니면 언제 다시 열게 될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갑작스럽고 놀라웠던 ‘여우주머니’와의 만남을 계기로 하여 발견하게 된 크랙 정원의 꽃들, 그 마지막을 이 작고 노랗고 당찬 식물로 이별을 하게 되어서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꽃들은 나의 존재에는 무관심합니다. 그저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지요.

그러나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꽃들아, 그동안 행복했고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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