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같이 마음이 고단할 때면 나는 자꾸만 삶을 거슬러 올라간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생애 어느 지점일지 모를 잔뜩 꼬여버린 실타래를 풀고 싶어 열심히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종착점은 늘 모태다.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자기혐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한없이 작아지고 또 작아진다. 그렇게 작아지다가 종래에는 점이 되어 소멸하였으면 싶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것이 곧 존재하지 않는 것일 테니.
죽음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은 잠시 밀어두기로 했다. 내 상태를 아는 유일한 작가님께서 먼저 권유해 주셨다. 나도 사실은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순순히 납득했다. 아직 그 정도의 판단력은 남아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근래에는 아무것도 입에 들이지 못했다.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예민해진 탓에 어차피 입맛도 없었지만, 쓰린 속에 어쩔 수 없이 삼킨 것들마저 모두 게워냈다. 살이 쭉쭉 빠진다.
나는 여러 글에서 몇 번이고 말했지만 죽고 싶지 않다. 잘 살고 싶다. 진심이다. 정말 잘 살고 싶다. 반대로 ‘잘’ 살지 못하면 죽고 싶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굉장히 야박해서 ‘잘’의 기준이 매우 높은 편이다.
그리 야박한 내가 바닥 없는 무저갱으로 처박힐 때면, 얼마쯤 지긋지긋한 삶의 의지란 것이 꾸득꾸득 기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반쯤 포기하고 싶은 나의 머리채를 마구 잡아 올리곤 예고도 없이 잊고 있던 어느 날의 다정을 욱여넣는다. 그래 그 의지는 나를 여지껏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살려냈다. 아주 지긋지긋하다.
아르바이트 경험담을 이야기할 때 나는 보통 열여덟 즈음의 패스트푸드점을 주로 얘기하지만, 사실 나의 첫 아르바이트 경험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늘 그렇듯이 나의 엄마는 아팠고, 부모님은 일찍이 이혼하셨다. 나는 혼자 자라며 못 먹거나, 집에 남아있는 것을 대충 주워 먹거나, 대부분은 혼자 라면을 끓여 먹었다. 병원에 함께 가줄 어른도 없었으니 지금 와 추측건대 아마 성조숙증이었을 테다. 나는 열두 살 시작점, 그러니까 만 열 살에 첫 생리를 했다.
가난했으니 용돈 같은 건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중학생이 되면서 또래보다 일찍 발달했던 가슴에 맞춰 그때그때 속옷을 사러 함께 가줄 엄마는 늘 누워있었다. 속옷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교복 안에 입을 민소매, 반팔 티셔츠, 흰 양말, 2~3일이면 올이 나가던 스타킹.
한창 손이 많이 가는 나이의 여자아이였던 나는 이런 것들이 항상 필요했지만, 엄마에게 돈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그럼에도 어렵게 용기를 낸 날의 엄마는 술을 마시고 울거나, 화를 내거나, 약을 먹고 자고 있었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 머리로 그곳에 찾아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저 가끔, 서너 달에 한두 번. 두 발 제한이 엄격했던 학교 때문에 들르던 집 앞 미용실이었다. 갈 때마다 퍽 다정히 대해주시던 여사장님이 내가 기댈 수 있던 유일한 어른이었나 보다.
나는 손님이 뜸한 시간대에 부러 찾아가 펑펑 울며 “알바를 시켜달라”고 빌었다. 최저시급 같은 거 안 주셔도 괜찮다. 악덕 업주처럼 마구 부려 먹으셔도 좋다. 그저 열심히 하겠다. 저 양말 한쪽 살 돈도 없단 말이에요. 제발 도와주세요.
가끔 음울한 얼굴로 와선 머리나 다듬고 가던 여자애가 느닷없이 눈물을 쏟아내니 사장님도 적잖이 당황스러웠겠지. 그녀는 나를 소파에 앉히고 따뜻한 물을 건네며 토닥여주었다.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다음 주부터 나오라고 말하더이다. 그때 내 나이가 열넷이었다. 부모 동의와는 하등 관계없이 법적으로 아르바이트가 금지되어 있는 나이. 사장님은 절대적 타인인 나를 위해 위험부담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나를 채용해 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약 1년 반 동안 주말마다 6시간씩 일했다. 사장님은 악덕 업주처럼 나를 고되게 부려 먹지도 않았으며, 여물지도 못했을 그 손 끝에도 최저시급은 칼같이 챙겨주었다. 끼니마다 그녀가 챙겨 온 반찬으로 함께 식사했고, 손님이 없을 때면 시답잖을 수다나 떨며 곰살맞게 지냈다. 그래, 그 사장님이 고단한 나의 삶에 최초의 다정이었구나.
요즘 마음이 힘들다는 이유로 미루던 작업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뒤늦게서야 겨우 손을 대기 시작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마음으로.
나는 언제나 가면을 잘 써내는 사람이니까, 여럿의 사람 사이에서 예쁘게 말을 전달하고 조율하며 그럴싸하게 있어 보이는 척하는 일은 쉽다.
그들은 다들 내게 수고한다며, 고맙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의 말만 듣자 하니 나는 참 대단하고 괜찮은 사람 같다. 실은 이토록 형편없는 나인 것을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는데.
나는 다만 조금 배가 고파졌다. 한사코 이런 것을 바란 게 아니라 해도 나의 취향까지 기억했다가 몰래 쥐어주는 그 다정들이 따뜻해서, 조금은 다시 배가 고파졌다. 허기를 채우고 싶어졌다. 다시 잘 살고 싶어졌다. 물론 나를 둘러싼 번민은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래도 차근차근 이겨내 보고 싶어졌다.
그러니 나를 둘러싼 모든 다정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