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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하는 여름에게

by 마른틈

오랜만에 내 친구 이야기를 해볼까. 이 친구와는 음… 이제 16년이 되어간다. 나는 아직도 가끔 이 애가 내 친구라는 게 믿기지 않아 되도록 자주 글로 남기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친구라는 이름보단 동경이 더 어울리겠다.

응, 이쯤에서 눈치챌 사람도 있겠지. 맞다, 그 애다. 내 [혼자 먹는 라면은 맛이 없다]에도 두 번이나 출연한 그 애. 자신이 글로 남겨지는 것이 언제나 좋다던 그 애. 조금은 야속하리만치 유한한 시간 속에서, 우리가 글 속에서만큼은 영원히 머물 수 있다는 걸 알려준 그 애.

그 애는 언제나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애도 나도 평범했으니 특별히 눈에 띄는 외모 같은 이유는 아닐 테다. 다만 그 애는 무엇이든 열정적으로 즐겼다. 남의 노력을 폄하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리하여 더욱이 노력했다. 그렇게 노력하는 자신을 스스로 멋지다고 칭찬할 줄도 알았다. 그런 모든 열정이 뜨거운 여름, 모래사장 위로 일렁이는 파도에 흩어지는 은빛 파편처럼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래서 나는 늘 그 애가 여름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그 애를 닮고 싶었다. 무기력했던 내가 조금이나마 열심히 살아보고 싶어진 건, 전부 그 애 때문이다.


여름을 닮은 내 친구는 내가 여름에 만난 남자와 네 번의 여름 끝에 헤어져 하염없이 울고 있을 때 케이크를 사 들고 난데없이 집에 들이닥쳤다. 나는 사실 네가 올 줄은 몰랐다. 정확히는 우리의 거리가 그 정도까지 친밀한 줄 몰랐다. 그냥 너무 힘들고, 딱 죽겠어서. 토해낼 곳이 그토록 없어서 부끄럽지만 네게 토해냈을 뿐인데, “조금 기다려보라”며 네가 들고 온 게 바로 그 케이크였다. 나는 비싸다던 투썸 케이크를 그날 처음 먹어봤다. 언제나 맞는 말만 하는 네가 “축하할 일”이라 하니 정말 잘한 일 같았다. 어쩐지 조금은 덜 슬퍼해도 될 것 같았다. 그래, 축하받을 일이구나. 나 좀 잘했나 봐…. 너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사회 초년생이던 나는 친구들을 만나면 습관처럼 밥을 사곤 했다. 내 사정이 특별히 나은 건 아니었지만, 직장인인 내가 학생인 친구들에게 꼭 밥을 사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게 있었다. 그리고 가방끈이 조금 길었던 내 여름은 그 기간이 특히 길었다. 당시 나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밥을 얻어먹었던 다른 이들은 이제 거의 기억조차 못 하는 것 같지만, 나의 친구는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나 보다. 그녀는 나만 보면 늘 맛있는 걸 사주고 싶어 하고, 때가 되면 좋은 것을 선물해주고 싶어 안달이다. 의도치 않게 친구를 잘 키워둔 셈이 되었으니 참으로 황송할 따름이다.


우리는 그다지 자주 보는 편은 못 된다. 못 볼 때는 일 년에 한 번. 자주 볼 때는 두세 번쯤. 하지만 우리는 거의 매달 한 번씩 연락한다. 마치 빚 독촉 따위를 하는 마음으로.


“생일선물 뭐 할 거야?”

“아… 아직 못 정했어. 조금만 더 고민해 볼게.”

“너 글 쓰니까 그거랑 관련된 거 어때?”

“오… 괜찮은 아이디어야. 키보드 좀 찾아볼게”


- 한 달 뒤 -


“키보드 골랐어?”

“아…! 아니. 나 작업용 노트북이 생겼어. 요새 이걸로만 작업해서 키보드가 필요 없어졌어. 조금만 더 고민해 볼게. 미안…”

“알겠어. 괜찮아”


그러니까, 생일선물을 ‘달라고’ 독촉하는 것이 아니라 ‘주겠다’고 독촉하는 것이다. 참고로 친구의 생일은 3월. 나의 생일은 8월에 있다.


나는 본디 기억력이 좋지 못해, 생일마다 의미 없이 적당한 기프티콘이나 주고받는 행위를 정말 싫어한다. 받았다가 의도치 않게 상대의 생일을 놓쳐 ‘먹튀범’이 되기도 싫고, 그렇다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이들의 생일을 일일이 달력에 저장해 두는 수고를 감수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기브 앤 테이크는 그 날짜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의 애정에 비례해야만 한다.

그리고 여전히 구시대적인 나는 써버리고 나면 잊어버릴 상품권이나 음식 따위보단, 바라보면서 그것을 건네준 이를 떠올릴 수 있는 형태 있는 선물이 좋다. 물론 이건 내가 줄 때도 마찬가지다.(나는 선물을 주며 "이거 쓸 때마다 내 생각해요" 라며 답지도 않을 플러팅을 건네는 사람이다.) 의미 있는 사람에게 받은 의미 있는 선물이라면 더욱이 금상첨화겠지. 나는 문득 얼마 전에 마라톤을 뛰가 비와 땀에 젖어 눅눅해진 가죽 시곗줄을 떠올렸다.


“나 생일선물 골랐어.”

“오, 드디어?”

“시곗줄 어때? (비싼 것과 안 비싼 옵션 두 가지 사진을 보여준다)”

“로즈골드 예쁘네. (당연하다는 듯 비싼 것을 고르며)”

“어휴, 그런데 시곗줄만 이 가격이면 너무 비싼데…?”

“다양한 옷에 매치하려면 이게 무난하겠는데? 이거로 해. 작가님한테 하는 투자야”

“아이고, 감사합니다.”


내 친구 역시 3월의 생일을 대비해 2월부터 6-7월까지 내가 보낸 연락 속에서 생일선물을 고민한다. 우리는 늘 그렇게 몇 달을 늘어지게 고민한다. 아마 이유야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 핑계 덕에 자주 볼 수 없는 우리가 연락이라도 주기적으로 할 수 다는 사실 내심 나를 들게 한다는 것을 너는 모르겠지.


내게는 늘 좋은 것만 쥐어주려는 네가 고르는 선물들은 때때로 김 빠지는 것들이라 나는 늘 “정말 이거면 돼? 좀 더 비싼 거 골라봐.”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네 다정한 배려에 두 손 두 발을 들고 마는 것이다. 대신에 언제나 정성을 가득 담은 선물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너를 만나러 가곤 한다.

너를 만나러 가는 초겨울의 하늘엔 옅은 노을이 저미고 있더라. 너를 보는 일이 처음도 아니고 이 애처로운 노을 또한 처음이 아닐진대, 사뭇 긴장스러운 마음에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다. 나는 어쩐지 조금은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짠. 시계 이쁘지”

“그러게, 엄청 잘 어울리는데?”

“그니까. 네 안목 정말 탁월하다. 아ㅡ 연아. 나는 네가 너무 좋아. 어떡하지”


난데없을 내 고백 공격에 너는 언제나처럼 푸스스 웃음을 흘려낸다.


"나는 타고나길 계산적인 인간이라서 사람을 좀 재거든. 내가 손해를 보는지 아닌지, 신경 안 쓰려해도 나도 모르게 자꾸 의식하게 되는 것 같아. 그런데 나 너한테는 그런 거 전혀 안 재게 돼."


너는 짐짓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다.


"좀 재도록 해."

"푸하하, 그렇지만 너한테는 여력만 된다면 뭐든 다 해주고 싶은 걸"

"그럼 내가 손해보지 않도록 해줄게."


일말의 고민도 없이 여상하게 대꾸하는 네 말에 나는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고 마는 것이다. "밥은 내가 쏜다"며 꺼내는 그 지갑이 2년 전 내 사정이 조금 어려워 네 생일에 "이런 것 밖에 못줘서 미안하다"며 면구하게 건넸던 수제 뜨개지갑이다. 이제는 잔뜩 손때가 타고 장식도 깨진 그것. 너는 충분히 더 비싸고 좋은 지갑을 살 수 있는 형편도 되는 애면서, "이게 아주 짱짱하고 편해. 내 애착지갑이야"라며.




“임신 축하해”

“헐 이거 뭐야? 진짜 대박 귀엽다”

“아기 덧신. 내가 직접 만들었어. 만삭 사진 찍을 때 소품으로 써. 조금 크게 만들어서 아마 돌까지 신길 수 있을


부드러운 그것을 만지작거리는 너의 얼굴엔 곧 있을 만남을 기대하는 설렘이 숨김없이 묻어 나온다. 너의 사랑이 아름답다. 너의 행복이 기쁘다.


“어떻게 지냈어?”

“좋은 소식 하나, 나쁜 소식 하나.”


나는 조금 설레는 얼굴로 좋은 소식부터 네게 건넨다. 언제나 그렇듯, 내가 너에게 바라는 건 딱 한 가지.


“와 정말 잘됐네. 그거 대단한 일이잖아. 나라면 절대 못했을 걸. 너 진짜 멋지다. 축하해.”

“고마워.”

“나쁜 소식은?”

“음… 너 배 부여잡고 심호흡 한번 해, 얼른”

“(배 감싸고 심호흡을 하며) 뭐길래 그래, 나 지금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 ---------------------- ”


나의 지난한 결심을 꺼내는 것은 처음이라, 나는 연신 네 표정을 살폈다. 이번만큼은 네가 나의 편이 아니면 어쩌지. 혹시라도 네 얼굴에 미처 숨기지 못한 균열이라도 발견할까, 나는 슬며시 배가 저렸다.

너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음료를 홀짝이다가 차분히 말을 꺼냈다.


“너 괜찮아?”

“… 괜찮지 않아서 괜찮아지려고 그 생각들을 로 쓰고 있어.”

“그렇구나… 너 진짜 마음고생 많이 했네.”

"있잖아. 나 좀 무서워. 내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런데 네가 믿어주면 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번에도 너는 일말의 고민이 없다.


"야. 너는 단 한 번도 못한 적이 없어. 나는 항상 너한테 '너 그거 할 수 있겠어?', '안 힘들겠어?'라고 물어봤는데 넌 다 했어. 지금도 봐. 너 내가 걱정했던 것들 이미 다 하고 있잖아. 넌 진짜 대단한 애야."


응, 난 널 믿으니까.

네가 날 믿어준다면, 나도 날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말을 듣고 싶어서 네가 보고 싶었나 봐.


내가 어디 있든, 내가 어느 슬픔 속에 빠져 허우적대든, 너는 내 여름이 되어줄 테니까.


나의 사랑하는 여름. 나의 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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