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얼마 전 나는 어떤 이에게 위와 같이 다정한 말을 들었다. 그때 내가 무슨 기분이었더라. 우선은 감사가 맞겠지. 그건 사회적 학습이다. 내게 건네진 선의에는 선의로 답할 것. 일종의 도덕적 규범이자 ‘정상’의 범주 속에 합의된 약속인 셈이다.
그러면 학습되지 않은 나의 본심은 무엇이었느냐고, 이제부터 말해볼까. 내가 과연 행복할 수 있나. 진창에 처박혀 아가미만 뻐끔거리며, 간신히 가쁜 숨이나 몰아쉬는 주제에 진정 ‘행복’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인가.
물론 나도 한때는 그것을 ‘흉내’ 내면 비슷하게나마 남들처럼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여긴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흉내일 뿐, 진짜가 될 수는 없다. 가짜임을 깨달은 뒤에야 찾아오는 현실감은 지독한 고독이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선의의 탈을 쓰고 살아간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듯, 그 속내와는 무관하게 선의는 그렇게 오간다.
그런데 나는 좀 이상한 것 같다. 선의를 받았으면 선의를 되돌려줘야 하거늘. 그게 사회적 학습이되, 합의된 약속일진대. 그럼에도 그딴 학습과 약속 따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싶어진다.
그래, 나는 웃는 얼굴에 침이나 뱉고 싶은 거다.
이따위의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 비교적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만신창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다 그런줄 알았지. 얘도, 쟤도, 너도. 다 그렇게 속내를 감추고, 시퍼런 날을 숨기고 살아가는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만 그랬던 거다.
사람을 불신하게 된 건 몹시 뿌리 깊은 일이다. 본디 대가리가 꽃밭인 나는 성선설을 믿었다. 그리고 지금도 대체로는 그리 믿으며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보이기에는 아주 물러터져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보일 테지. 허허실실 웃다가 보증도 서 줄 것처럼 만만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 나는 성악설을 믿는다. 정확히는, 언제든 당신이 내게 칼을 꽂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칼은 꼭 비유가 아닐 수도 있다. 물성을 가진 진짜 그것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까지 들은 당신은 꽤나 황당하겠지. 내가 너에게 왜? 망상이 심한 거 아니냐고.
당신이 옳다. 당신은 굳이 내게 시간과 공을 들여 그런 행위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일을, 살아가면서 가장 당하면 안 될 사람에게 당했다. 아주 깊고 어두운 밤에.
그러니 이건 나의 어쩔 수 없이 뿌리 깊은 인간 불신이다. 진절하고 축축한 슬픔이자 내상이다. 그것만은 치유되지 않아, 찾아오는 매일 밤의 추락이다.
여린 속부터 찢기고 곪기를 반복하던 상처였다. 아주 오래된 그것이 차라리 단단해 울퉁불퉁하고 못생긴 흉터라도 되었다면 좋았으련만, 여전히 이따금씩 갈라진 틈새로 피가 새어 나오고 진물이 배어 나온다.
내상은 그런 거다. 흉터가 될 수 없는 일. 지리멸렬하도록 현재진행형일 수 밖에 없는 상처. 누군가는 묻겠지, "너 도대체 언제까지 그 기억에 갇혀 있을래?"
그러니까 이토록 만신창이인 나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아주 적절한 가면을 써낼 뿐이다. 예컨대 웃는 얼굴에 차마 침은 뱉지 못하고, “세상에, 덕분에 오늘 하루가 정말 따뜻해졌어요. 당신은 정말 세심한 사람이네요.”라고 대답하는 거다.
나는 살아가면서 이따금씩 다정의 말을 듣는다. 그럴때면 어쩐지 정말, 울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잔뜩 찌푸린 미간을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아, 정말 너덜너덜해 곪아버린 인간이 티나지 않게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아니 당신들은 쓸데없이 다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