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 Confrontation] 거울 저편 9
5막. 유혹
by 나는 달을 건너는 중입니다 Feb 28. 2026
5막
유혹
-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그게 뭔데?”
나는 숨을 삼켰다. 네가 또 이상한 말을 던지고, 나 혼자 그 말 위에서 며칠을 굴러 떨어져야 한다는 걸, 나는 이제 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너는 늘 그랬고, 나는 늘 그걸 따라갔다.
거울 속 너는 잠깐 말이 없었다. 마치 ‘방법’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운 일인 것처럼. 마치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는 듯이 침묵한다.
나는 거울을 더 가까이 들이댔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프레임을 움켜쥔다.
“말해줘. 나… 더 이상 이렇게는 못 버텨.”
- 그럴 줄 알았어.
너는 웃는지 아닌지 모를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 방법이 있으면, 넌… 뭘 하게 되는 건데?”
- 그거부터 묻네.
“그럼 뭐부터 물어봐.”
- 방법이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건데?
순간 말이 막혔다. 방법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 건지. 나는 늘 방법을 기다렸다. 병원도, 약도, 거울도.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하면 된다’라고 말해주기를. 그런데 이제 너는 되묻는다. ‘네가’ 어떻게 할 거냐고.
입술이 마른다. 나는 대답 대신 물었다.
“너만은 나를 속이지 말아줘.”
- 네가 나를 믿는다고 했잖아.
“믿지. 믿는데… 무서워서 그래.”
- 무서우면 더 생각해 봐.
너는 아주 천천히 말을 골랐다. 오늘의 너는 이상하게 친절했다. 그 친절함이 더 무서웠다.
- 방법은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없어. 아직은.
“왜?”
- 말해주는 순간, 넌 도망칠 수도 있고… 더 깊이 들어올 수도 있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 …
거울 속 너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달빛이 거울 표면에 닿아 너의 윤곽을 잠깐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순간, 네 눈을 제대로 본 것 같았다. 아니, 본 것 같았다는 착각일 수도 있다. 요즘은 착각마저도 내 편이라서.
- 다음 보름달까지 생각해 봐.
“뭘 말이야?”
- 방법이 있다면, 너는 받아들일 건지.
“너는?”
- 나는… 네가 결정하는 걸 지켜볼 거야.
나는 그 방법이 뭐냐고 기어코 묻고 싶었다. 그런데 네가 이미 답을 피해 가고 있다는 걸 안다. 억지로 캐물으면, 너는 또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무너질 것이다.
“그래. 생각해 볼게.”
- 그래야지. 또, 한동안 ‘광증’은 없을 거야. 내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해.
너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들릴까 말까 한데, 나는 그걸 들었다. 이상하게, 이런 건 잘 들린다.
- 그리고… 네가 진짜로 나를 원하면, 그때는, 거울은 더 이상 거울이 아니게 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너는 사라졌다. 거울 안에는 다시 나만 남았다.
-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나는 습관처럼 손을 더듬어 거울을 찾았다. 가슴팍에 넣어둔 거울이 손에 닿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거울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다.
침대는 침대였다. 이불은 이불이었다. 내 손등 위에 얹힌 촉감이 종량제봉투 같지 않았다. 그냥 면이었다. 따뜻하고, 조금 거칠고, 늘 있던 그 촉감.
나는 천천히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세면대는 세면대였고, 칫솔은 칫솔이었다. 치약을 짰다. 고추냉이가 아니었다. 이상하게, 그게 너무 슬펐다.
내가 이걸로 기뻐해야 하는데, 마음 한 켠에 네가 떠오른다. 네가 없는 정상은, 이제 내게 정상 같지가 않다.
-
며칠이 더 흘렀다. 광증은 뚝 하고 끝나지 않았다. 대신 서서히 아주 얄밉게 물러났다. 아침에는 멀쩡하다가도 저녁이면 잠깐 틈이 생겼다. 컵이 잠깐 소화기로 보였다가, 내가 눈을 깜박이면 다시 컵이 됐다. 신호등이 막대사탕으로 보이려는 순간이 오면, 그 직전에서 멈췄다. 가장 신기했던 건, 내가 거울을 안 봐도 괜찮아지는 순간들이 점점 늘었다는 거다. 예전에는 1시간이었다. 그다음에는 2시간. 이제는 반나절도 버틸 수 있었다.
몸도 더 이상 바뀌지 않았다. 와인잔도, 허수아비도, 소화기도, 소나무도 아니었다. 내 손은 손이고, 내 팔은 팔이었다. 내 얼굴은 내 얼굴이었다. 그게 좋으면서도 동시에 공허했다. 너를 잃고 정상만 남는다는 건, 마치 사랑을 잃고 숨만 남는 것 같았다. 숨이 남았으면 됐다고들 하는데, 나는 이제 잘 모르겠다.
-
결국 회사에 나가기로 했다. 병가를 더 끌 수도 있었지만, 집에만 있으면 너 생각만 했다. 널 생각할수록, 또 네 질문이 떠올랐다. 방법이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건데. 그 질문이 내 방 천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일상에 몸을 던져서 그 질문을 떼어내고 싶었다.
정장을 입는다. 시계를 찬다. 우비도, 대파도 아닌 진짜 정장과 시계다. 오랜만에 출근이다. 머리를 다듬는다. 넥타이를 맨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묶는다. 거울을 한 번 보려다가 참았다. 일부러 참았다. 나도 해낼 수 있다는 걸, 나 스스로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회사 앞. 건물은 건물이었다. 하늘은 하늘이었다. 태양이 별사탕이 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유리문이 잠깐 물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유리였다. 그래, 아직 남아있구나. 그런데 그건 예전처럼 나를 삼키지는 않았다. 그냥 상처와 흉터처럼 남아있을 뿐이었다.
사무실로 들어가기 직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리님?”
은혜였다. 반가운 얼굴이지만, 나도 모르게 웃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굳어졌다.
“잘 지냈지?”
“몸은 괜찮으신 거죠? 또 갑자기 병가 쓰셨길래 얼마나 놀랐는데요.”
“미안해. 어쩔 수 없었다.”
“대리님, 근데…”
은혜가 내 얼굴을 유심히 본다. 그 눈빛이 괜히 무서웠다. 나는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표정을 안다. 요즘 내 표정은 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표정이 안 좋아보이세요. 다 나으신 거 맞죠?”
“…그래?”
“네. 아니, 음, 이상하다는 건 아니고… 솔직히 말하면요.”
그 말이 내 가슴을 쿡 찔렀다. 예전 대리님. 예전의 나. 그건 내가 가장 싫어하면서도 가장 그리워한 단어였다.
“그런데요.”
은혜가 말을 잠깐 멈춘다. 괜히 뜸 들인다. 그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오늘은… 옛날의 대리님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나는 대답을 못 했다. 돌아온 것 같다니. 내가 어디로 갔었나. 나는 늘 여기 있었는데. 다만 내가 나를 못 알아봤을 뿐인데.
“그 말… 좋네.”
“진짜로요. 오늘은 좀… 사람 같아요.”
“나 원래도 사람이었거든.”
“에이~ 그건 아는데요. 그냥… 느낌이요.”
은혜는 가벼운 척 웃었지만, 그 말 속에는 진짜 걱정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걱정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돌아온 게 아니라, 그냥 잠깐 정상인 척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까.
업무를 시작한다. 메일을 확인하고, 결재 서류를 보고, 전화가 오면 받는다. 서류가 휴지로 보이지 않았다. 볼펜이 오징어다리로 보이지 않았다. 그게 너무 당연한데도, 나는 몇 번이나 종이를 만져봤다. 진짜 종이인지 확인하듯이. 그러다 문득 가슴팍을 더듬었다. 거울이 있는지. 습관처럼. 거울은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나는 꺼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
퇴근길에 은혜가 또 말을 걸었다.
“대리님, 저번에 말한 밥은 언제 사주실 거예요?”
“아… 까먹었다.”
“헐. 이제야 옛날의 대리님 같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원래 대리님은 늘 이렇게 한 번씩 약속을 흘리셨거든요.”
은혜가 웃었다. 나도 웃었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내 웃음이 내 웃음 같았다.
-
그날 이후로, 광증은 더 빠르게 사라졌다. 회사라는 공간이 날 붙잡아준 건지, 아니면 네가 남긴 말이 내 눈을 붙잡아준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였다. 광증이 사라질수록, 반대급부적으로 나는 더 자주 너를 생각했다.
웃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서류를 넘길 때도, 사람들 사이에서 ‘괜찮다’라고 말할 때도. 그리고 매번, 그 질문이 돌아왔다.
- 방법이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건데.
처음에는 답이 뻔했다. 당연히 하겠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그 뻔함이 무서워졌다. 내가 너무 쉽게 하겠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래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이미 선을 넘은 사람이다. 너를 만난 순간부터. 거울을 사랑한 순간부터. 거울 안의 너를 ‘너’라고 부른 순간부터.
-
보름달이 뜬 밤.
달이 야밤의 광대로 떠올라 훔친 빛으로 겨우 숨을 잇는 밤. 우리는 거울을 사이에 두고서만 만날 수 있었다. 비록 유리 한 장이 전부인데도, 우리는 천천히 가까워지고 마음만큼은 하나로 맞물려 간다고 믿었다. 가끔은 거울 너머로 가고 싶을 정도로, 반대편에만 있어야 할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너는 모를 거다. 그렇기에 네가 없는 일상은 더 이상 내게 소중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모든 건 우리 사이에서만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 사물은 사물대로, 일상은 일상처럼. 정오의 태양이 만물의 그림자를 숨기며 진실을 가로막을 때, 달 아래 우리는 만물의 본모습을 알아봐 주는 존재였다. 이렇게 매일 밤이 나에게는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될 것이다. 찬란함이 순간이 아니라 영원으로 변하길 바라며. 그 방법은 무엇인지 모르겠다만, 네가 나한테 안 좋은 짓을 할 리가 없다. 어떤 방법일지라도 난 따를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미 확인했다. 합치된 마음을 증명하는 단계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네가 말한 대로, 보름달의 여명이 찬란하게 집안을 내리쬐는 밤, 나는 거울 앞에 섰다. 광증도 사라지고, 너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야 거울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는 듯하다. 내가 이렇게 생겼었지. 시간이 멀다 하고 거울을 쳐다봤었음에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나는 거울을 한참 들여다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거울은 차가웠다. 유리는 늘 차갑다. 그런데 오늘은 차가움이 단단하지 않았다. 얼음이 아니라 물 같은 차가움. 손끝을 대자 거울 표면이 아주 미세하게 꺼지는 느낌이 났다. 심장이 내려앉는다.
나는 눈을 떴다.
거울 속에는 네가 있었다. 너는 오늘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그 표정으로 나를 봤다. 기다렸다는 표정. 내가 결국 올 걸 알았다는 표정.
“생각… 다 했어.”
- 그래?
“응.”
- 그래서. 넌 어떻게 할 건데.
네가 다시 그 질문을 던진다. 한 달 내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그 질문. 나는 대답 대신, 거울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를 바라봤다. 내 얼굴. 내 눈. 내 입. 내가 나인 증거들.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광증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이미 나는 다른 걸 잃었기 때문이다.
“할게.”
- …
“너랑 평생.”
너는 아주 미세하게 숨을 들이켠 것 같았다. 아니, 숨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느꼈다. 네가 흔들린다는 걸. 나는 한 발을 내딛는다.
거울 저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