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멸망한다면 누가 끝까지 살아남을까.
용감한 사람? 판단이 빠른 사람? 아니면 힘이 센 사람?
김이환 작가의 <소심한 사람들만 남았다>는 그 질문에 아주 엉뚱한 답을 내놓는다.
“소심한 사람들이요.”
제목을 보는 순간부터 호기심이 생긴다. 정말 소심한 사람들만 남았다고? 설정은 황당한데, 읽다 보면 그 황당함이 묘하게 설득력을 얻는다.
이야기는 ‘수면 바이러스’로 시작된다.
사람들은 하나둘 잠들어버리고, 세상은 순식간에 멈춘다.
이런 세계 멸망 이후의 상황을 흔히 ‘아포칼립스(apocalypse)’라고 부른다. 아포칼립스는 원래 ‘계시’라는 뜻이지만, 지금은 문명 붕괴나 인류 멸망 같은 재난 상황을 의미하는 장르 용어로 더 많이 쓰인다.
보통 아포칼립스라면 폭력, 약탈, 생존 경쟁이 난무하는 거친 세상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 소설은 다르다.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소심하다는 것.
(9p)
나는 정말 소심해서 탈이다. 내가 얼마나 소심하냐면, 세상이 멸망해서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는데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창밖을 내다보면서 어쩌면 좋을지 소심하게 고민만 하고 있었다.
세상이 망했는데도 뛰쳐나가지 못하고 창밖을 바라보는 주인공.
아포칼립스의 주인공치고는 지나치게 망설임이 많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모두가 잠들어버린 세상.
식량을 구하기 위해 결국 마트로 향한다.
여기서 또 한 번 예상이 빗나간다. 재난 상황에서 마트를 턴다면 보통은 약탈과 다툼이 떠오르지만, 이곳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사이좋게 음식을 나눠 먹고, 마트 안에서 함께 생활한다. 딱 필요한 만큼만 챙긴다. 괜히 더 가져갈 수 있는데도 망설인다.
(38p)
“뭐 드실 건가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아포칼립스에서도 “아무거나 괜찮아요.”
세상이 무너졌는데도 메뉴 결정은 어렵다. 이 사소한 디테일이 계속 웃음을 만든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레고 매장이다.
(86p)
다들 욕심이 생겨서 각자가 갖고 싶은 레고를 들고 가져갈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소심한 사람들답게 결국 레고 상자를 뜯진 못하고 다시 진열대에 놓았다.
“레고가 없다고 죽지는 않으니까요.”
먹을 것은 챙겨도 장난감까지는 차마 손대지 못하는 사람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세상에서조차 스스로 선을 넘지 않는다. 그 모습이 우습다가도 이상하게 따뜻하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다시 등장하는 문장.
(260p)
나는 정말 소심해서 탈이었다.
소심해서 망설였고,
소심해서 싸우지 않았고,
소심해서 과하게 빼앗지 않았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들.
우리는 흔히 소심함을 고쳐야 할 단점처럼 여긴다.
적극적이지 못하고,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소심한 사람들은 쉽게 선을 넘지 않는다.
함부로 가져가지 않고, 함부로 상처 주지 않는다.
결정은 느릴지 몰라도,
최소한 타인을 밀어내며 앞서가지는 않는다.
모두가 잠든 세상에서
누군가는 마트를 차지하려 들지 않고
다 같이 나눠 먹으며 필요한 만큼만 챙기고
레고는 다시 내려놓는다.
그 장면이 오래 남았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하던 소심함은
세상을 조금 덜 망가지게 만드는 성질일지도 모른다.
어이없어서 웃다가,
다 읽고 나면 괜히 다정해지는 소설.
정말 ‘소심해서 탈’인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고,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