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

by 히읗



사람의 삶은 어디까지가 운명이고, 어디부터가 선택일까. 태어나는 순간 이미 정해진 삶이 있다는 말은 과연 어디까지 맞는 이야기일까.


한국 문학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 박경리 작가의 작품을 이번에 처음 읽어보게 되었다. 사실 언젠가는 꼭 읽어보고 싶었던 작품은 대하소설 <토지>였다. 하지만 그 방대한 세계에 들어가기 전에, 작가가 어떤 결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인지 먼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작품이 바로 김약국의 딸들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사건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대신 한 도시를 천천히 보여준다.


“통영은 해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일찍부터 항구는 번영하였고, 주민들의 기질도 진취적이며 모험심이 강하였다.” (10p)


이야기의 무대는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도시, 통영이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항구로 번성했던 곳이고, 외지 사람들이 들어와도 양반 행세가 별 의미 없을 만큼 생활력이 강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이 배경 위에서 한 집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딸 다섯을 둔 집


주인공은 ‘김약국’이라 불리는 김성수와 그의 아내 한실댁이다. 김성수는 원래 약국을 운영하던 집안의 후손이지만, 실제로는 약국을 접고 어장 사업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김약국’이라 부른다.


그들에게는 아들이 없다.

대신 다섯 명의 딸이 있다.


“큰딸 용숙은 샘이 많고… 둘째 용빈은 영민하고 훤칠하고… 셋째 용란은 말괄량이지만 어여쁘고… 넷째 용옥은 손끝이 야물고… 막내 용혜는 상냥하고 귀염성스럽다.” (99p)


어머니 한실댁은 딸들 하나하나에게 나름의 미래를 그려본다.

누군가는 좋은 집 며느리가 될 것이고,

누군가는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을 것이고,

누군가는 살림을 잘 꾸려갈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 기대는 하나씩 무너진다.


“허 참, 김약국도 딸들 땜에 망하네, 망해.” (279p)


이 소설에서 딸들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과부가 되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몰락하기도 하고, 배신을 겪기도 하고, 비극적인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욕망 때문에 추락하고

누군가는 시대와 관습 때문에 희생되고

누군가는 아무 이유 없이 운명의 파도에 휩쓸린다.






사랑, 욕망, 그리고 시대


이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인물들을 단순히 선악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점이다. 욕심 많은 큰딸도 결국 가족을 돌보는 사람이 되고, 사랑 때문에 몰락한 딸도 단순한 타락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들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은 개인의 성격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관습과 신분, 그리고 선택할 수 없었던 조건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어머니 한실댁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 가장 강하게 남는다. 자식들의 불행 앞에서 신에게 매달리고, 분노하다가도 다시 무릎을 꿇는 장면은 인간의 절박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목신 신령님, 살려주시이소… 죄가 있으믄 이 어미가 받겄십니다.” (329p)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

하지만 그 마음으로도 막을 수 없는 삶의 비극.


이 장면은 이 작품 전체가 품고 있는 정서를 상징하는 듯하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낯설지 않은 이유


김약국의 딸들은 오래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략결혼이 당연했고, 신분과 관습이 사람의 삶을 좌우하던 시절이다.


그런데도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그 안에 있는 감정이 너무나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가족에 대한 기대,

사랑 때문에 흔들리는 마음,

자식을 지키고 싶어 하는 부모의 마음.


시대는 다르지만 사람의 감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김약국의 딸들은 한 가족의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한 시대의 이야기다. 바다 도시 통영을 배경으로, 한 집안의 몰락과 딸들의 삶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운명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읽는 동안 여러 번 느낀 것은 박경리라는 작가가 인물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깊다는 점이었다.


누군가를 쉽게 비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삶을 낭만적으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부모와 자식 역시 각자의 삶을 가진 ‘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때로는 보호가 아니라 통제가 되고, 개인의 욕망과 선택이 억눌릴 때 어떤 비극이 만들어지는지도 함께 드러난다.


특히 딸들의 삶을 바라보는 부모의 기대와 판단, 그리고 그 시대의 관습이 겹치면서 인물들은 점점 자신이 원하는 삶과 멀어져 간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선택과 억압, 사랑과 집착이 결국 한 집안의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인상적으로 남는다.


다만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대 자체가 워낙 답답하게 느껴져 읽는 동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개인의 선택보다 가족과 관습이 앞서던 시절의 공기가 작품 전반에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통해 박경리라는 작가가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깊이를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의 대표작인 토지도 꼭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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