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 작가의 <회색인간>은 짧은 단편들이 모여 있는 소설집이다. 각 단편의 분량은 길지 않지만, 이야기마다 인간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질문이 담겨 있다.
외계인, 신인류, 초능력 물건 같은 SF적인 설정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도착하는 곳은 인간이다. 인간이 집단 속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욕망은 어떤 선택을 만들고, 한 사람의 행동이 어떻게 집단을 변화시키는지를 여러 이야기로 보여준다. 그중 특히 인상 깊었던 단편들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다.
<회색인간>
어느 날 한 도시에서 만 명의 사람들이 사라진다. 그들을 납치한 것은 지저 세계에 사는 인간들이다. 지하 세계가 꽉 차버렸다는 이유로 지상의 인간들에게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한 강제 노동을 시킨다.
사람들은 진흙 맛이 나는 빵을 먹으며 끝없는 노동을 해야 한다. 배고픔과 피로 속에서 인간다운 감정은 점점 사라져간다.
“사람들은 항상 지쳐 있었고, 항상 배고파 있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엔 웃음이 없었다. 눈물도 없었다. 분노도 없었다. 사랑도 없었고, 여유도 없었고, 서로를 향한 동정도 없었으며, 대화를 나눌 기력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마치, 회색이 된 듯했다.” (10p)
극단적인 상황에서 인간에게 남는 것은 단순한 생존 본능뿐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저 배고픔을 느끼는 몸뚱이 하나만 남을 뿐.” (12p)
하지만 이 회색 같은 세계 속에서도 작은 변화가 시작된다. 한 노인이 쓰러진 화가에게 자신의 빵을 나눠준 것이다.
“넌 살아남아. 우리 모두가 죽더라도 너는 꼭 살아남아. 꼭 살아남아서 우리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겨줘.” (19p)
그 행동 하나가 사람들 사이에 작은 파문을 만든다.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이야기를 기록하겠다고 말한다.
“여전히 사람들은 죽어나갔고, 여전히 사람들은 배가 고팠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회색이 아니었다.” (21p)
이 단편은 인간의 집단 심리를 보여준다. 집단 속에서 인간은 쉽게 무기력해지고 서로에게 무관심해질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단 한 사람의 행동이 집단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기도 한다. 인간성은 생각보다 쉽게 사라지지만, 의외로 작은 행동 하나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아웃팅>
이 이야기의 배경은 인조인간이 인간 사회에 섞여 살아가는 세계다. 인조인간은 인간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심지어 본인조차 자신이 인조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하지만 그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사람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들은 더 이상 ‘같은 인간’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 취급된다.
“인조인간으로 밝혀진다고 해서 그가 죽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정말로 무서운 한 가지는 바로 인간들의 차별이었다.” (46p)
이 단편은 차별이 얼마나 쉽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아주 작은 차이 하나만 있어도 집단은 ‘우리’와 ‘그들’을 나누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강렬하다.
“철창 안에는 외계인이 없었다.
그저 놀라 커진 눈으로 최 기자를 보고 있는 1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 (73p)
그리고 철창에 붙어 있던 문구.
“[멸종 위기 동물 : 인간]” (74p)
기자는 선언한다.
“저는 오늘, 전 인류를 아웃팅하러 왔습니다.” (75p)
결국 우리가 서로를 구분하며 만들어온 경계는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드러난다.
<손가락이 여섯 개인 신인류>
이 단편은 인류의 인공 진화를 다룬 이야기다. 정부는 인간의 발전을 위해 앞으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갖도록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연구가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뭐, 뭐야? 그럼 우리 애는 어떡하라고?” (90p)
이미 여섯 손가락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나고 있었고, 부모들은 아이들이 차별받을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사회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92p)
정부, 언론, 시민 모두가 차별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뭐야? 가능하잖아?” (94p)
차별이 사라진 것이다.
이 단편은 인간 사회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차별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집단이 마음먹으면 충분히 바꿀 수 있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보물은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이 이야기에는 지구 어디든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신비한 구슬이 등장한다.
어떤 사람은 그 구슬을 이용해 가뭄을 해결하고 환경을 정화한다.
“이렇게 내가 지구 곳곳의 가뭄도 해결해주고, 미세 먼지가 많은 날이면 비로 정화도 시키곤 해! 지구를 관리하는 비의 신이라고나 할까?” (151p)
하지만 주인공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한다.
“저런 구슬만 있다면 자신은 떼돈을 벌 자신이 있었다.” (152p)
같은 물건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바라보는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
마지막 문장은 그 차이를 보여준다.
“정 대리가 비 오는 날을 가장 좋아했다는 것을 몰랐고,
자신이 맑은 날을 가장 좋아했다는 것을 몰랐고,
아내가 흐린 날을 가장 좋아했다는 것을 몰랐고…” (159p)
결국 그는 보물을 손에 쥐고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다. 욕망이 시야를 좁히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는 메시지가 남는다.
<어린 왕자의 별>
외계인에게 납치된 사람들이 어느 별에 떨어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별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은 그곳에서도 사회를 만들고 갈등을 만들며 살아간다.
“정말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별이었다.” (298p)
하지만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결국 사회를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참 재미있게 살았다. 아무것도 없는 심심한 별에서도 별별 일들을 만들며 참 재미있게 살았다.” (301p)
마지막에 밝혀지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 별은 어떤 아이가 가지고 있는 과학 장난감 속 작은 생태계였다.
인간들은 그 안에서 관찰되고 있었을 뿐이다.
이 장면은 인간 중심적인 시선을 뒤집는다. 우리가 거대한 문명과 사회를 만들며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더 큰 관점에서 보면 그 모든 것이 작은 실험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동식 작가의 단편들은 대부분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한다.
- 인간은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변하는가
- 차별은 왜 생기는가
- 욕망은 인간의 시선을 어떻게 바꾸는가
- 집단은 왜 쉽게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짧은 이야기 속에서 실험하듯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의 단편들은 읽는 동안에는 가볍게 느껴지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묘하게 생각이 오래 남는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가는가.
짧은 단편들이지만 인간 사회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흥미로운 소설집이었다. 생각이 오래 남는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가는가.
짧은 단편들이지만 인간 사회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흥미로운 소설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