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오역하는 말들 / 황석희

by 크랜베리

황석희 작가의 <오역하는 말들>은 번역 작업의 비하인드와 언어를 다루는 직업적 시선이 담겨 있다. 번역가로서의 전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자신의 삶에서 발견한 오역의 순간들을 솔직하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황석희 작가가 말하는 오역은 단순히 문장을 잘못 옮기는 행위가 아니다. 타인의 말, 나의 감정, 삶의 사건들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며, 마음의 오역을 막는 법을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책에 가깝다.


“남의 말은 왜 그리 귀에 잘 박힐까. 그것도 좋은 말이 아니라 나쁜 말만 잘 박힌다. 아흔아홉 명이 좋은 말을 하고 한 명이 나쁜 말을 하면 결국 기억에 남는 건 한 명의 나쁜 말이다.” (87p)


나쁜 말만 유독 또렷하게 남는 우리의 감정 체계를 정확히 건드린다.




“그 누구에게도 정의되지 말자. 특히나 내게 무가치한 사람이 하는 좋지 않은 말에는 더욱. 그들에게 정의되지도, 한정되지도 말자.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이며 나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누군가의 의견을 참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나를 가장 잘 알고, 나를 가장 아끼는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기로 하자.” (92p)


타인의 말속에서 스스로를 오역하지 말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명확하다.




“열심히 하면 높은 확률로 뭐든 되기는 된다. 그런데 그 ‘열심’이라는 게 반드시 올인일 필요는 없다. 그렇게 무턱대고 영혼을 갈아 넣어 성공했다는 사람들도 사실은 그 정도까지 올인한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 (120p)


“자꾸만 지치고 숨이 막히고 현실이 생각 같지 않겠지만 그 길이 원래 그래요. 고된 길을 걸으면서도 때때로 그 하루가 보람차고 즐거워 슬쩍 웃게 되기를, 그런 날이 생각보다 많기를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121p)


한 문단을 읽는 것만으로도 숨이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이 든다.




“자괴감, 패배감, 무력감, 시기, 질투, 후회, 실망감처럼 부정적인 태도와 감정이 패시브 passive처럼 장착돼 있어서 오늘은 어떻게든 열의를 갖고 일하더라도 내일은 다시 마음이 바닥까지 곤두박질친다.” (141p)


오늘은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해보려고 해도 다음 날이 되면 다시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앉아 버린다.




“불안이 내 속을 아무리 좀먹어도, 피가 철철 나도 그냥 그러려니 하는 선천성 무통증 환자처럼.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 안 아팠던 걸까. 모르겠다. 어쩌면 너무 아파서 아픈 줄도 몰랐는지도. 사람들 말이 요즘은 마흔쯤 돼야 저런 불안을 겪는다더라. 서른 때 저런 불안 잘 모른다고. 정말 그럴까, 아니면 그때의 나처럼 아프지 않은 척하는 걸까.” (142p)


그때 나는 정말 하나도 안 아팠던 걸까? 아니면 너무 아파서 몰랐던 걸까.




“반드시 건설적이고 실용적인 시간만이 필요한 건 아니다. 저런 ‘한심한 시절’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어설프고 한심하고 그저 즐겁고 우스꽝스럽던 시절이. 그런 시절은 단순히 낭비된 시간이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자양분이 되는 시간이다.” (147p)


“목적 없이 흘려보낸 한심한 시간이 역설적으로 언젠가 가장 쓸모 있는 기억이 되기도 하니까.” (148p)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 그리고 ‘낭비 같던 시간’에 대해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슬픔이 올 땐, 홀로 은밀히 오지 않고 떼로 몰려온다. 셰익스피어 <햄릿> 4막 5장 말씀.” (205p)


감정의 파도는 늘 한꺼번에 밀려오는 법이라는 설명이 묘하게 위로된다.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의 행동을 번역하다 보면 이런 오역을 저지르기 쉽다. 아이의 말과 행동을 번역할 땐 어른 사전을 잠시 치우고 아이 사전을 펼쳐야 한다.” (215p)


부모라면 마음이 뜨끔해질 수밖에 없는 문장인 것 같다.



“애초에 좋은 위로의 말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다. 격과 식을 갖춘 말이야 있겠지만 온전히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는 마법 같은 위로의 말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272p)


“개인적인 행복과 타인의 불행을 동시에 마주하는 순간에도, 때로는 죄책감으로 때로는 감사함으로 삶을 이어간다. 삶은 이토록 모순적이고 불가해하다.” (272p)


삶의 모순과 복잡함을 가장 담담한 문장으로 건네는 장면이었다.




<오역하는 말들>은 우리가 매일 하는 선택, 감정 해석, 타인의 말에 흔들리는 순간들 모두가 ‘번역’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이 책은 잘 번역하는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덜 오역하며 살아가는 법을 깨닫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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