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에서 가장 강하게 다가온 건 시대가 사람에게 남긴 상처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문장은 책의 시작부터 심장을 눌렀다. 모두가 각자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대, 어른도 아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적들에게 짓밟히고 가난에 허덕이던 식민지의 삶 속에서, 하루 벌어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한 되의 보리쌀만 받아도 하루 종일 일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는 묘사는 그 시절의 공기가 얼마나 참혹했는지 그대로 전해준다.
순자의 삶도 그 시대의 한가운데 있었다.
부산에서 시작된 그녀의 어린 시절,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어지는 가족의 역사. 그녀는 수많은 순간 선택을 강요받고, 그 선택 위에서 또 생을 꾸려나가야 했다.
“여자의 일생은 고통이 끊이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그녀의 삶은 계속해서 버텨야만 하는 연속이었다.
이후 세대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정착을 꿈꾼다.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이 최소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야 했던 현실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디에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모자수와 솔로몬의 이야기는 이국에서의 삶이 얼마나 난해하고 복잡했는지를 잘 드러낸다.
하지만 2권에서는 “이 전개가 정말 필요할까?” 싶은 장면들이 이어진다. 여성들이 겪는 부당함이나 굳이 자세하게 묘사된 성생활의 디테일은 읽는 동안 거북하기도 했고, 갑작스럽게 흐름이 튀는 듯한 전개도 있었다.
그럼에도 다른 구절들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순자가 평생 들었던 “여자는 고생하다 죽는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신물이 난다고 하는 대목, 그리고 고통이 날카롭던 시대의 돌멩이처럼 조금씩 무뎌져 간다는 표현은 세월이 사람을 어떻게 깎아내고, 또 어떻게 단단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나이 들고 세월을 온몸으로 견뎌낸 순자가 삶을 돌아보는 모습은 말없이도 많은 감정을 남긴다.
먼저 떠난 사람들, 각자의 길을 걸어간 두 아들과 손자, 그리고 시대가 허락하지 않았던 꿈과 삶들. 자신이 지나온 그 모든 시간을 끌어안은 채 묘 앞에 선 순자의 모습은 조용하지만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책 속의 문장들
<1권>
11p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13p
적들에게 짓밟히거나 자연재해로 황폐해진 나라에서는 으레 그렇듯이 노인과 과부, 고아 같은 약자들 은 식민지 땅에서 더없이 절박한 처지였다. 한 명이라도 더 먹여 살 릴 수 있다면, 보리쌀 한 되만 받고도 하루 종일 일하려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48p
여자의 일생은 일이 끊이지 않는 고통스러운 삶이데이. 고통스럽고 또 고통스러운 게 여자의 인생 아이겠나. 니도 각오하는게 좋을 끼다.
<2권>
18p
일본에 사는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적어도 이름을 세 개 가지고 있었다. 모자수는 평소에는 백모세의 일본식 이름인 보쿠 모자수라고 불렸고, 학교 문서와 거주증에 올라 있는 일본식 성인 반도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서양 종교에서 따온 이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조선인 성, 빈민가 주소 등을 볼 때 모자수가 어디 출신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그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278p
순자는 평생 동안 다른 여자들한테서 여자는 고생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여자는 어린 소녀로, 아내로, 엄마로 고생하다가 죽는다는 소리였다. 고생이라, 순자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신물이 났다.
377p
고통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날카로웠던 가장자리가 바닷가 돌멩이처럼 무뎌지고 부드러워졌다.
<파친코>는 거대한 역사가 한 개인과 한 가족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끊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내려 했던 사람들, 악착같이 버티며 삶을 이어간 세대들의 숨결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