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암행 / 정명섭

by 크랜베리

정명섭 작가의 <암행>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오컬트 소설이지만, 흔히 떠올리는 요괴 이야기나 익숙한 민담의 재현과는 거리가 있다. 조선판 퇴마록에 가깝고, 등장하는 존재들도 설정도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뻔하지 않다는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처럼 느껴졌다.


소설은 시작부터 강렬한 살인 사건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막힘없이 진행되는 전개 덕분에 초반부터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된다. 더 인상적인 설정은 잘나가는 가문에서 태어나 이제 막 성공한 암행어사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살인 용의자가 된다는 점이다. 자극적인 설정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배경과 서사가 충분히 깊어 인물의 몰락이 가볍게 소비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답답함이 느껴지는 순간들도 있다. 주인공은 스스로 선택했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살인자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서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 강제성 때문에 답답함이 생기기도 하고, 요괴들이 비교적 갑작스럽게 등장하면서 개연성이 부족한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의문은 이야기의 말미에 다다를수록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왜 이런 방식이어야 했는지, 왜 이 인물이 이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는지가 드러나면서 아직 나오지 않은 2권을 기다리게 만드는 여운을 남긴다.


이 작품은 단순히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운명이라는 굴레에 묶인 한 인간의 비극에 가깝다. 한국적인 오컬트 분위기 위에 쌓아 올린 주인공의 서사는 읽는 내내 서글픈 감정을 남긴다. 영웅담보다는 어둠을 걸어야 하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리고 책의 구성/연출이 작년에 읽었던 배명은 작가의 <수상한 한의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찾아보니 두 작품 모두 같은 출판사였다. 이 출판사의 책을 많이 접해보지는 않았지만, 사건이 깊어질수록 책의 분위기를 흑백 대비로 표현하고, 점점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는 시각적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글의 분위기뿐 아니라 책 자체의 구성까지 이야기에 맞춰 변주되다 보니 몰입감이 더해졌고,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 역시 빨라졌다.


<암행>은 조선이라는 익숙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오컬트와 운명, 비극을 결합해 새로운 결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품이다. 모든 답을 내놓지 않기에 더 궁금해지고, 그래서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된다. 어둠을 걷는다는 ‘암행’이라는 말이 끝까지 이 소설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의 문장들


(24p) 암행어사가 뭔지는 알지?

전하의 밀명을 받고 변복을 해서 지방관리의 비행을 감찰하는 일 아닙니까?

맞아. 힘들고 이런저런 압박과 회유를 많이 받는 일이라 보통은 젊고 강직한 관리를 보내지. 사헌부의 수장이신 대사헌께서 자네를 추천하셨네.

>> 암행어사라는 직책이 단순히 멋있는 역할이 아니라, 위험하고 외로운 자리라는 걸 처음부터 분명히 짚어 준다.



(60p) “사람에게는 운명이라는 굴레가 있답니다. 내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그 굴레의 무게에 못 이겨 쓰러질 때가 있지요.”

>>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너질 수 있다는 말이 오래 남는다.



(65p) “인간은 오랜 운명의 굴레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운명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므로 피하는 것도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하죠.”

“가족을 잃고 누명을 쓰는 게 저의 운명이란 말입니까?”

“정확하게는 운명의 시작이죠.”

>> 비극조차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다는 말이 잔인하게 다가온다.



(68p) “암행이라는 뜻이 어둠을 걷는다는 말인데 내가 딱 그 꼴이군요.”

>> 직책의 의미가 주인공의 처지와 정확히 겹쳐지는 순간이다.



(77p) “세상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보이는 것만 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하지만 과인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 봐야만 한다.”

>> 이 작품이 단순한 추리나 역사물이 아니라 오컬트로 확장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문장이다.



(85p) “삶과 죽음은 희미한 경계선으로 나눠질 뿐이죠. 언젠가 답을 찾으실 겁니다.”

>> 이후 전개를 암시하는 말처럼 느껴져 의미심장하다.



(127p) “스스로 산 자이기를 바라신다면 산 자로 사셔야 합니다.”

>>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듯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말처럼 읽힌다.



(168p) “세상은 억겁과 같은 죽음에 둘러싸여 있으니까요. 삶과 죽음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 같지만 때로는 그 경계가 희미하기도 합니다.”

>> 이야기 속 세계관이 가장 잘 드러나는 문장 중 하나다.



(169p) “죽음은 항상 삶을 질투합니다. 죽음 이후에 얻는 게 많다고 해도 한 조각의 삶보다 못한 법이니까요. 그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은 것이지요.”

>> 삶의 가치를 뒤늦게 깨닫는 인간의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321p) “외롭고 쓸쓸했겠구나.”

>> 암행의 길을 걷게 된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는 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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