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리뷰에는 책의 초반 설정과 일부 전개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 정보 없이 읽고 싶다면, 스포일러에 주의해 주세요.
백희성 작가의 <빛이 이끄는 곳으로>는 건축이라는 다소 낯선 소재를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소설이다.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건축가가 쓴 소설이라는 점은 이 작품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 소설은 건축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건축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과 감정, 선택을 바꾸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건축에 대해 잘 몰라도, 오히려 몰라서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이야기는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아침, 파리에서 일하던 건축가 뤼미에르는 부동산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평범한 직장인의 형편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시테 섬의 유서 깊은 저택이, 믿기 힘들 만큼 낮은 가격에 나왔다는 연락이었다. 그 집이 자신에게 온 이유가 ‘건축가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23p) 결국 없는 돈으로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보겠다는 헛된 망상만 키워가는 중이었다.
(24p) 나는 아주 싸고 낡은 집을 원했다. 스스로 고치고 만들어 나에게 선물할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뤼미에르는 집을 소유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공간을 이해하고 완성해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 소박한 욕망이 그를 스위스의 요양병원,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세계로 이끈다.
빛이 말을 걸어오는 공간
요양병원은 부서진 중세 수도원을 개축해 만든 독특한 건물이다. 건물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이 소설의 큰 매력 중 하나로, 책 중간중간 등장하는 건물 스케치는 상상을 구체로 바꾸며 독자가 공간 속을 직접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곳에서 뤼미에르는 설명할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한다.
(66p) 모두가 바라본 것은 그 노인이 아닌 테이블로 향하는 빛기둥이었다.
빛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우연이 아니다. 매년 단 하루, 단 몇 분 동안만 허락되는 빛의 이동은 이 건물에 숨겨진 비밀의 신호이자 초대장이다.
(98p) 이 집의 이름은 ‘4월 15일의 비밀’이에요.
건축은 이 소설에서 배경이 아니라 장치다. 빛이 건물의 구조를 따라 움직이고, 그 움직임이 이야기를 열어젖힌다. 건축 이야기가 나오지만 전혀 딱딱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수께끼의 중심에 놓인 질문
집 주인이자 요양병원의 소유주인 피터로부터 받은 편지에는 반복되는 질문이 담겨 있다.
(104p) 왜 4월 15일인가? 그리고 왜 당신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미스터리가 아니다. 뤼미에르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이자, 건축가로서 어떤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묻는 물음처럼 읽힌다.
시간이 흐르며 드러나는 4월 15일의 의미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가족, 기억, 그리고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날이었다.
(318p) 아이와 처음 만난 날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320p) 그에게 4월 15일은 가족이라는 의미의 또 다른 단어였다.
건축은 결국 사람을 향한다
이야기의 끝에서 건축은 더 이상 미적인 대상이 아니다. 상처 입은 사람을 위로하는 공간이 되고, 기억을 품어 주는 장소가 된다.
(349p)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이 다친 사람들을 위로하는 병원을 만드는 것이다.
(351p) 모든 이들의 기억의 장소는 바로 집이었다.
이 문장에 이르면, 이 소설이 왜 건축을 이야기하고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건물은 단단한 구조물이 아니라, 사람의 시간을 담아 두는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빛이 이끄는 곳으로>는 건축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사람의 기억과 삶을 향해 나아가는 소설이다. 이 책에서 집과 병원, 공간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간이 머물렀고, 다시 흘러가게 된 자리였다.
빛이 특정한 날에만 허락되듯, 우리에게도 각자의 삶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혹은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사람은 공간을 만들고,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