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고래눈이 내리다 / 김보영

by 크랜베리

이 소설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감정으로 읽히는 책은 아니다. 이야기마다 분위기도 다르고, 설정도 제각각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모든 단편이 고르게 마음에 남았다기보다는, 유독 오래 곱씹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 리뷰는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몇 편의 단편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내가 특히 마음에 남았던 이야기는 <고래눈이 내리다>, <까마귀가 날아들다>, <봄으로 가는 문>이다. 이 세 편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읽고 나면 공통적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과 ‘선택 이후의 세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스포일러 주의




<고래눈이 내리다>

고래가 죽으면 그 사체는 해저로 가라앉고, 이를 ‘고래 낙하’라고 부른다. 가라앉은 고래의 사체는 오랜 시간 동안 분해되며 다양한 심해 생물들에게 영양분이 되고, 그 과정에서 마치 눈처럼 잔해가 흩날리듯 내려앉는다. 처음 이 소설의 제목을 접했을 때는, 단순히 이 자연 현상에서 착안한 비유적 표현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말하는 ‘고래눈’은 자연의 순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인간이 버린 쓰레기, 인간의 무분별한 소비가 결국 생태계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눈이 내린다’는 이미지로 표현한다. 아름다운 단어와 달리, 그 눈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인간이 남긴 흔적들이 천천히, 그러나 피할 수 없이 세계에 쌓여가는 모습에 가깝다.


이 이야기가 인상 깊었던 이유는 환경 문제를 직접적으로 설교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자연에 남긴 결과를 조용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래의 죽음 이후에도 생태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지지만, 인간이 남긴 쓰레기는 또 다른 방식의 ‘낙하’로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 소설은 그 사실을 차분하게, 그러나 묵직하게 전한다.


(9p) 눈발이 짙어지자 나는 고래가 죽었나 보다 생각했다. 고래가 죽으면 눈발이 짙어진다. 고래의 죽음은 이 어둡고 춥고 적막한 마을에 내리는 생명의 찬가다.


(13p) 언제부터인가 이 마을에는 눈송이 외에도 다른 것이 쌓인다. 썩지 않는 것들, 좀비 벌레마저도 먹지 못하고 토해내는 것들.


(14p) 어린아이들이 눈송이인 줄 알고 삼켰다가 토하지도 싸지도 못하고 배가 빵빵하게 터져 죽고 마는 것들이다.






<까마귀가 날아들다>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저승사자의 이미지를 ‘까마귀’라는 존재로 변주한 이야기다. 이 까마귀는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는다. 죽음을 앞둔 사람, 혹은 스스로 죽음을 결심한 사람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는 설정이 특히 인상 깊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버리는 순간 그 존재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설정이다. 까마귀는 죽음을 강제로 끌고 가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 상태에 반응하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죽음을 외부에서 주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어떤 이들에게는 ‘결심의 순간’으로 다가온다는 점을 짚어낸다.


또한 이 까마귀는 단순히 죽음을 관장하는 상징에 그치지 않는다. 생명의 정수를 물고 꺼낸다는 설정은 이 존재를 더욱 신비롭고 낯설게 만든다. 죽음과 생명이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어딘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단편은 짧아서 더 아쉬웠다. 장편으로 확장된다면 까마귀라는 존재와 인간의 관계가 더 깊어질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설정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죽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이 어떤 마음 상태에서 죽음을 떠올리게 되는지를 섬세하게 건드린 이야기였다.


(169p)

까마귀가 세 개의 발을 창턱에 걸쳐놓으며 말했다.

“안녕, 나는 네 죽음이야.”

“놀랄 것 없어. 오늘 저녁에 너는 죽어. 응? 알고 있었잖아? 죽을 작정을 했으니 내가 찾아온 거니까.”


(174p)

“숨이 끊어지면 내가 네 심장에 부리를 박을 거야.”

감재가 여자의 가슴을 콕콕 찍었다.

“물리적으로 박는 건 아니야. 상처 하나 없이 스윽 들어가지. 그리고 네 심장에서 펄떡이는 생명의 정수를 물어 꺼낼 거야. 나는 그걸 물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를 거야. 그 뒤에는…… 아, 그 뒤는 업계 비밀이야. 가보면 알아.”


(175p) “죽음은 언제든 취소 가능해. 저승은 인심이 좋거든. 안 오겠다고만 하면 바로 물러줘. 계약금 반환할 것도 없고 대가 치르는 것도 없어.”


(176p) “날 없애는 방법은 하나뿐이야. 마음에서 죽을 결심을 거둬. 그러기만 하면 돼. 그러면 나는 한순간에 네 눈앞에서 사라질 거야.”






<봄으로 가는 문>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뉘는 세계를 그린 이야기다. 문 너머에는 다른 삶이 있고, 이쪽에는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있다. 겉으로 보면 ‘다른 선택’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이 남기는 여운은 훨씬 현실적이다.


문은 언제든 건너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지금의 세계가 지치고 힘들어졌을 때, 친구를 따라 문을 넘어 다른 세계로 가는 선택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오래 마음에 남는 이유는, 문 너머보다 문 앞에 서 있는 현재의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있는 이 세계도 이미 한 번의 선택으로 넘어온 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선택을 기억하지 못할 뿐, 아무 선택도 하지 않은 채 이곳에 도착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문 앞에서의 망설임은 새로운 선택이 아니라, 이미 선택해 온 삶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일 것이다.


이 소설은 떠나는 선택만큼이나 남는 선택에도 의미를 둔다. 문을 넘지 않고 이 세계에 남는 것은 단순히 참고 버티는 일이 아니라, 내가 이미 선택한 인생을 계속 살아가겠다는 또 하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판타지적인 설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의 삶과 아주 가까운 감정을 건드린다.


(262p) 문은 그곳에 있었다. 문은 말 그대로 문이었다.


(269p) 어린 날에는 내 아픔이 다 밖에서 온 줄 알았다. 내가 본래 가진 것은 다 좋고 빛나는 것뿐이고 내게 있는 어둠은 다 세상이 주었다 믿었다. 하지만 어쩌면 슬픔은 처음부터 내 생명에 깃들어 있었으리라.


(269p) 내가 그 문에 들어섰을 때 기억이 다 났다.

어린 날 내가 너와 함께 이 세상으로 건너왔다.

내게 딱 맞는 세상을 뒤로하고, 내가 원래 잘 끼워져 있었던 곳을 박차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도 부대끼거나 거스르지 않는 세상을 내버리고. 그저 낯선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게 익숙지 않은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호기심과 흥분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새처럼 날아 이곳에 왔다.






이 소설집에서 인상 깊었던 이야기들은 모두 직접적인 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남긴다. 인간이 남긴 흔적은 결국 어디로 흘러가는지, 죽음은 어떤 순간에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지, 그리고 우리는 이미 어떤 선택 위에 서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모든 단편이 강렬하게 남는 책은 아니었지만, 몇몇 이야기들은 읽고 난 뒤에도 오래 마음속에서 움직였다. 그래서 이 책이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이야기가 끝난 뒤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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