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미씨의 등장

by 오로라

로맨스 소설을 쓰다 보면 남주 이름 짓기가 제일 어렵다.

멋있으면서도 흔하지 않고, 입에 잘 붙으면서도 독특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이름을 쓰면 주변에서 "그거 우리 오빠 이름인데?"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늘 조심한다.

이름은 남주의 운명을 결정하는 첫 단추이자, 독자가 주인공을 사랑하게 만드는 첫 문이다.


그날도 키보드 앞에서 이름과 씨름 중이었다. 후보만 열몇 개. 지우고, 쓰고, 바꿨다가 다시 지우기를 반복.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순간 그냥 "남주는 여주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니까... 도우미로 해야겠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팍 하고 떠올랐다.

'영원히 쓰는 것도 아니고 이름이 정해질 때까지만 쓰는 거니까 괜찮을 거야.'라는 합리화를 하고 문장을 이어갔다.


"도우미씨가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도우미씨의 눈빛은 차갑고도 강렬했다."


쓸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마음을 잡고 읽게 되자 폭소가 터졌다.

남주 이름이 도우미씨라니. 강렬하고도 매혹적인 남주가 한순간에 푸근한 인상의 친철한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진지하게 읽을 수가 없었다.


웃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상상력이 폭주했다. 만약 이 원고를 남편이나 아이가 봤다면 어땠을까?

"엄마! 왜 주인공 이름이 도우미야? 숙제 도와주는 사람이 주인공인 거야?"

"이름 참 실속 있네. 당신이 쓰는 소설이 생활 밀착 로맨스인 건 확실하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남편의 놀림 소리에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행인 건 아무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혼자 알고 있어도 민망한 건 마찬가지다.


나는 곧바로 그 이름을 지웠다. 그러나 지우면서도 계속 웃음이 났다. 글을 쓰며 이렇게 배꼽을 잡고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이 소소한 사건은 언젠가 반드시 글감이 되겠구나' 싶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이름을 고를 때마다 일명 '도우미 테스트'를 한다. 모니터에 이름을 쓰고 소리 내 읽어보는 것이다.

"도우미씨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 장면이 웃기면 무조건 탈락. 덕분에 내 원고 속 남자들은 철저한 검증을 거쳐 살아남는다. 남주 선발전에서 '웃기지 않은 이름'이라는 최소 조건을 통과한 사람들인 셈이다.


돌이켜보면 이 사건은 아주 작은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그때 얻은 깨달음은 크다.

글은 결국 디테일 싸움이라는 것. 이름 하나가 이야기를 살리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다는 것.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작은 실패들조차도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날 '도우미'라는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면, 나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남주 이름만 붙들고 골머리를

앓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잠시 놓아버렸던 순간 우연히 생긴 이 해프닝 덕분에, 글쓰기가 조금은 가벼워졌다. 실수도 농담처럼 받아들이면 글의 재료가 된다.


도우미씨는 내 원고에서 사라졌지만, 내 글쓰기 인생에서는 절대 잊히지 않을 캐릭터로 남았다. 언제가 코믹 에세이 한가운데 깜짝 등장해 다시 한번 나를 웃게 해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해프닝은 앞으로도 계속 생길 것이다. 숙제 같은 글쓰기의 순간마다, 엉뚱한 이름과 황당한

사건이 튀어나와 나를 당황시키겠지만, 결국 그게 또 새로운 사건이 된다. 이 연재는 그런 기록이다.

엄마의 작은 책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소동들을, 웃음과 함께 차근차근 이어가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