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 약관을 읽는데 남주가 튀어나왔다

현실 50%, 상상 충전 50%

by 오로라

보험 약관을 보는 순간 나는 잠시 멈칫했다.

연애 감정도 아니고, 글쓰기 고민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심장이 살짝 불안해지는 종류의 복잡함이 밀려왔다.그리고 깨달았다. 연애보다 더 복잡한 건 약관이라는 사실을.


글자 크기 7포인트쯤 되는 것 같은 문장을 읽다가 눈이 쏟아질 것 같아 스크린을 확대해 보았다.

그런데 확대를 하면 할수록 글자는 커지는데 이상하게 내용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보장 범위가 넓을수록 좋아요."


보험 설계사님은 태블릿을 토닥이며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이상한 연결이 툭 튀어나왔다.


'오.. 남주도 보장 범위가 넓어야 하는데..'


그렇다.

보험 약관을 읽으면서 남주 캐릭터를 떠올리는 사람.

그게 나였다.

약관은 거대한 벽처럼 버티고 있는데, 남주 설계도는 열정적으로 떠오르는 이 기묘한 우선순위.


보장 범위의 설명이 내 머릿속에서 이렇게 변환되기 시작했다.


-말투 보장.

-행동력 보장.

-위기 대응과 감정 몰입은 필수 보장.


'음.. 남주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면 안 되지..'


이쯤 되니 나는 약관이 아니라 남주 스펙 체크리스트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상담사님은 계속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기 부분이 좀 복잡하긴 한데요. 핵심을 꼼꼼하게 따져보는 게 제일 중요해요."


그런데 나는 그 말조차 남주 캐릭터 작법 강의처럼 들렸다.


음.. 맞아.. 남주는 꼼꼼해야지.

계략남은 디테일이 생명이고,

츤데레는 도도한 태도와 다정한 태도의 비율이 정확해야 하지.

순정남은... 일관성이 생명이자 포인트...


보험 상담을 받으며 앉아 있는데 갑자기 혼자만 소설 강의실에 있는 느낌이었다.

현실에서는 보장 범위를 계산하고 있지만

내 상상 속에서는 호감도, 위기 대응력, 서사 비중을 체크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약관은 반밖에 이해 못 했고,

상담 내용은 반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남주 설계도는 오히려 선명해졌다.


보험 상담이 끝나고 새로운 보험 증권이 내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에는 새로운 남주가 한 명 더 들어와 있었다.


돌이켜보니 조금 웃기고, 조금 든든하다.


보험은 내 미래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남주 설계도는 내 상상력을 열정적으로 흔들어 놓는다.


하나는 현실에서 나를 잡아주고,

하나는 이야기 속에서 나를 앞으로 밀어준다.

둘은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동시에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현실이든 이야기든

조금씩 준비하고 조금씩 상상하는 것.

그게 앞으로도 내가 지켜갈 가장 나다운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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