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작가 지망생 엄마의 관찰 기록
요즘 동네 엄마들 모임에 가면 애들 학원 얘기 다음으로 반드시 나오는 주제가 있다.
바로 로맨스 드라마.
"야, 어제 그 남주 표정 봤어? 심장 멈추는 줄."
"아니 도대체 어디서 황홀한 문짝남들은 계속해서 나오는 거야?"
그 장면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어떤 표정이었는지 이미 완벽하게 공유된 상태다.
나도 고개는 끄덕이는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 엄청난 남주를 보고 엄마들은 "와.. 설렌다." 라며 외치는 동안, 나는 "시청률이 여기서 터졌겠군..."이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
심지어 남주 얼굴의 각도를 재면서
"와.. 이건 시청자들을 설레게 만드려고 작정을 한 각도인걸?" 이란 말을 속으로 한다.
작가지망생의 병은 이렇게 시작된다.
친구가 추천한 웹소설은 더 심했다.
"이거 누워서 읽다가 숨 막힐 뻔."
"왜?"
"설레서."
그래서 봤다. 그런데 숨이 막힌 이유는 설렘이 아니라 어떤 문장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동사 때문이었다.
흠... 왜 '걸었다.'가 아니라 '디뎠다'를 썼을까?
왜 하필? 리듬? 의도가 있나? 아님 캐릭터의 상태?
나 혼자만의 국과수 분석이 시작됐다.
나는 주인공의 감정이 아닌 문장 속 동사를 따라가며 헤엄치고 있었다.
로맨스를 즐기는 방식이 다른 엄마들과 미세하게 엇나가 있는 느낌이다. 엄마들은 멋있는 장면이 나오면 '와우!' 하고 탄성을 지르는데, 나는 남주의 캐릭터성, 여주의 감정 변화 폭, 키스 타이밍 등을 머릿속에서 배치하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 이 분석은 일상까지 침투했다.
소파에 앉아 예능을 보고 있는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당신은 저렇게 손목이 잡히면 어떤 감정이 들것 같아? “
남편은 '무슨 그런 질문을?'이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냥.. 아프겠지."
현실의 남주는 로맨스 감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프다는데 감정선이 어디 있겠나.... 후...
그래도 나는 로맨스를 좋아한다. 아니, 로맨스를 보면 분석 모드가 '탁' 켜지는 걸 보면 조금 집착하고 있을지도.
엄마가 되고 로맨스를 알게 된 뒤로는 더 그렇다.
감정이라는 게 그저 설렘이 아니라 하루를 버티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드라마 속 과장된 대사, 웹소설 속 터질듯한 남주와 여주의 케미, 저 멀리서 빛나는 남주의 어깨너비(개인적 취향). 그 모든 것이 잠깐이라도 숨을 들이마실 공간을 만들어준다.
현실의 빨래, 청소, 장보기, 요리 등 언제 끝날지 모르는집안일의 미로 사이에서 숨 한 번 돌릴 수 있는 작은 틈.
나는 그런 틈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어떻게 생겼는지 그 구조를 뜯어보게 된다.
작가는 왜 이런 충돌을 배치했을까?
왜 여기서 멈추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을까?
엄마들이 로맨스를 쉬는 시간으로 소비할 때,
나는 그 로맨스를 '공부 시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가끔은 스스로도 피곤하다.
그냥 누워서 내용을 즐기고 설레면 될 텐데.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로맨스를 온전히 즐길 줄 모르는 걸까?
의외로 그 대답은 간단했다.
누군가의 하루를 잠깐 멈추게 해주는 그 장면 하나를 쓰고 싶어서다. 그 순간을 누군가에게 한 번은 주고 싶어서 나는 지금도 드라마의 각도를 재고, 웹소설 문장의 리듬을 해부해 보고, 남편의 감정선까지 조사하고 있다.
조금 덜 로맨틱해 보일지도 모른다. 조금 과하게 진지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배우고, 뜯어보고, 정리해 두는 이유는 하나다. 언젠가 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아주 작게라도 숨을 내쉬며 미소를 짓는 그 순간이, 지금의 온갖 집착을 단번에 의미 있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