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밤

그게 이렇게 조용할 줄은 몰랐다.

by 오로라

그날 밤은 남주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일부러 불러오지 않았다.


아이 숙제는 평소처럼 식탁 위에 펼쳐져 있고, 냉장고 문은 하루에 열두 번쯤은 열었다 닫았다.

저녁은 평범했고, 설거지는 평소처럼 식기세척기가 대신했고, 하루는 무사히 흘러갔다.

이 모든 과정은 늘 있었던 일이라 특별할 게 없었다.


그런데 집이 조용했다.

조용한데 평화롭지 않은, 육아 가정 특유의 정적이었다.

소리는 있는데 대화는 없는 상태.


보통 이 시간쯤이면 노트북을 열고 남주를 호출한다.

이건 거의 습관이라서, 노트북을 열면 자동으로 남주가 튀어나와야 하는데

그날은 업데이트가 멈춘 느낌이었다.


평소의 남주는 꼭 한 마디씩 남긴다.

쓸데없이 다정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단호하거나, 현실에서는 아무도 대신 말해주지 않는 말들을

잘도 해준다.


"그 정도면 훌륭해요."

"오늘은 여기까지!"

"당신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날은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남주도 없었다.


아이 숙제가 끝난 뒤의 시간은 원래 시끄러워야 한다.

유튜브 소리, 빨래 돌아가는 소리, 괜히 꼴깍 거리며 마시는 물 한 컵.

그런데 그날의 조용함은, 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빈자리가 있어서 생긴 조용함이었다.


남주가 없으니, 대사도 없다.

대사가 없으니, 감정도 같이 줄어든다.

감정이 줄어드니 생각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이 질문을 남주 없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소설 속 남주는 늘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현실의 나는 질문만 잘 던지고 대답은 늘 미뤄두는 편인데.

그 말을 해주던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내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가 로맨스를 쓰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게 아니라는 걸.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다.

현실에서는 아무도 대신 말해주지 않는 문장들을 누군가의 입을 빌려 듣고 싶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나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다.

내가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해 만들어낸 가장 그럴듯한 화자가 남주니까.


그날은 끝내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남주는 등장하지 않았고, 나는 조용히 하루를 접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남주가 없는 하루는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조용함이 내가 다시 그를 부르게 될 이유라는 것도 알고 있다.


로맨스는 가끔 쉬어가야 더 오래 쓸 수 있다.

그래서 그날 밤, 나는 남주 대신 불을 먼저 껐다.


.. 피곤해서는 아니었다.

이전 24화드라마는 설레는데, 나는 각도를 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