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면

아무 일도 없어서 기억에 남았다

by 오로라

오늘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밖으로 나왔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보통은 집으로 바로 돌아온다. 그게 제일 효율적이고, 괜히 다른 선택지를 만들 필요도 없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왜인지 동네를 한 바퀴 더 걸었다.


날씨가 좋아서였던 것 같기도 하고, 집에 가면 집안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해서였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이유를 찾아내려고 해도 이런 날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는 빨간색이었고, 90초에서 1초씩 숫자가 낮아지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에도 애매한 시간 앞에서 괜히 휴대폰을 꺼냈다가 딱히 볼 것도 없어서 금세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뉴스도 재미 없었고, 카톡도 조용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소설 속에서는 이런 순간 보통 뭔가가 일어난다.

누군가 신호를 무시하고 심각한 얼굴로 뛰어오며, 서로의 눈이 마주치고, 길을 다 건너기 전에 팔을 붙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걸 잘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초록불이 켜졌고, 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내 앞으로 지나가는 유모차는 천천히, 장바구니를 손에든 아주머니는 빠르게.

그리고 나는 그 중간쯤의 속도로 길을 건넜다.


아무도 뛰지 않았고, 아무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으며,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괜히 머릿속에 떠올랐던 남주는 신호등 앞에서 존재의 이유를 잃었다. 이 장면에서는 현실만 존재할 뿐이다.


길을 다 건너고 나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 또렷하게 다가와서 괜히 멋쩍었다.

그래서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동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아이스크림 냉동고 앞에 잠깐 섰다가

'하.. 지금 먹으면 속이 애매해질 것 같은데.'라는 생각에 다시 문을 열고 나왔다. 이 나이에 아이스크림은 늘 선택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터덜터덜 집으로 들어오니 아직도 오전이었다.

엄마로서의 할 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주부로서 할 일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오늘따라 세탁기도 건조기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잠깐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소파에 앉았다.

리모컨을 들고 TV를 틀었다. 뭐가 나오든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멍하니 화면을 보았다.


오늘 오전의 장면은 소설로 쓰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고, 에세이로 쓰기에도 의미가 붙어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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