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옵션에 유령 부양이 생겼다.
내 인생의 옵션에 유령부양이 추가될 줄은, 그날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기 전까지는 꿈에도 몰랐다.
"여보, 나 판교로 발령 났어. 그래서 지금.. 집 보러 왔어."
드라마 대본에도 이토록 불친절한 전개는 없을 것이다.
같이 사는 아내가 여기 있는데, 도대체 누구랑 집을 보러 갔단 말인가.
"누구랑?"
"이사님이랑."
그 이사가 이사(moving)가 아니라 직함이라는 건 알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긴급 재난 문자보다 더 큰 사이렌이 울렸다. 아.. 진짜 이사를 가야 하는구나.
내가 사랑하던 우리 빌라.
그 안온했던 도보 생활권이 빠직하고 접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완벽한 도보족이었다. 3분이면 갓 구운 빵냄새를 맡을 수 있고, 7분이면 지하철이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던 동네. 장롱면허 20년을 버티게 해 준 그 달콤한 행복이
남편의 전화 한 통에 통째로 뒤집혔다.
며칠 뒤 마주한 낯선 동네의 풍경은 바깥공기보다 싸늘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무서울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찢겨 펄럭이는 입주자 사전 점검 현수막만이 을씨년스럽게 우리를 반겼다.
누구의 생활도 묻지 않은, 냄새부터가 새것인 무채색의 도시였다.
남편이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저기야."
새 집과의 첫 조우를 한 날, 나는 결국 엉엉 울어버렸다. 남편이 열심히 찾았다던 그곳은 단 한 곳만 보고 내린 결정이었고, 다른 후보들은 애초에 넘볼 수 없을 만큼 비쌌다는 사실이 비수처럼 꽂혔다. 그러나 진짜 기함한 일은 뒤이은 남편의 브리핑이었다.
"우리... 분양권을 사서 이사 가야 해. 중도금 대출 승계도 해야 하고... 프리미엄이 붙어."
내 머릿속엔 낯선 단어들이 우르르 무단 입주를 시작했다.
대출 승계, 프리미엄, 옵션 비용..
단어들이 늘어날수록 통장의 숫자도 줄어드는 것 같았다.
체감상의 가난이 성큼 다가오는 것 같아서 나는 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걱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내 눈두덩이고 그만큼 불었다.
하지만 걱정과 눈두덩이는 이사를 멈추게 할 명분이 되지 못했다.
몇 주 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부동산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사장님이 내어준 믹스커피가 지나치게 달았다. 그 인위적인 단맛이 혀끝을 마비시키는 동안, 내 앞에서는 수억 원의 빚이 담긴 종이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작은 크기의 글자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서류 더미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좁은 사무실 안에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밝았다. 수수료를 챙길 사장님도, 프리미엄을 챙겨 떠날 전 주인도, 출퇴근 시간 단축이라는 희망에 부푼 남편까지도.
그들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내 어깨는 바닥으로 수작 하강했다. 축제 분위기 속에 홀로 슬픈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나만 빼고 모두가 샴페인을 터뜨리려는 찰나, 전 주인이 골라둔 옵션표가 밀려왔다.
발코니 확장. 시스템 에어컨 4대. 유광 화이트 주방 상판.
'흰 상판이라니.. 카레 흘리면 야단 나겠는데.. 김치 국물은.. 어쩌지? 뭐.. 잘 보이면 더 열심히 닦으려나.'
합리화인지 결심인지 모를 계산기가 마음속에서 딸깍거렸다.
곧이어, 전기세의 반란을 일으킬 시스템 에어컨 4대의 이미지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때, 서류 뭉치가 쑥 하고 눈앞으로 밀려왔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도장을 쾅 찍었다. 손끝에는 잔뜩 힘을 주었는데, 통장의 잔고는 그 힘을 따라 신나게
탈출하는 기분이었다.
'괜찮아.'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월금은 은행 앱에 찍히자마자 자동이체의 숲으로 전력 질주할 거라는 걸 말이다.
"축하드립니다. 좋은 날이네요. 집에 가셔서 파티하세요."
부동산 사장님의 웃음 섞인 인사에 멈췄던 눈물이 또 찔끔 나왔다. 남들은 감격의 눈물이라 생각했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건 서류 더미의 무게에서 비롯된 불안이자, 아직 팔리지 않은 우리 빌라를 향한 슬픔이었다.
"그래도 학교랑 가까워서 좋다, 그렇지?"
사무실을 나오며 남편이 밝게 물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삼켜야 할 말을 꼴깍 삼켰다.
'집은 두 채인데 통장은 하나네. 아니, 통장 주인은 은행이고 우리는 그냥 관리자인거지?'
허탈이 지나가면 감정은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온다. 잘 살 수 있을까? 이자를 감당할 수 있을까? 빌라는 언제쯤 팔릴까? 수많은 질문 앞에서 희한하게도 대답은 하나였다.
'우리 가족이 같이 있잖아.'
떨어져 사는 것보다, 같이 버티는 쪽을 우리는 택한 셈이었다.
우리가 웃고, 붙잡고, 밥 냄새로 채우는 순간 집은 우리에게 조금씩 가까워질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옵션은 전 주인이 골랐지만, 살아낼 옵션은 우리 가족이 고르면 된다. 집은 그렇게, 진하게 우리 것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작은 희망이 생기자 배가 고파졌다.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을 사서 나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저기.. 빌라 반장인데요. 이사 가신다면서요? 근데 이사 가셔도 집 팔릴 때까지 관리비 내셔야 하는 거 알고 계시죠?"
순간, 머릿속에 그렸던 온기가 식었다. 새로 산 집의 대출 이자는 다음 달부터인데, 팔아야 할 빌라는 벌써부터 제 몫의 밥값을 요구하고 있었다. 내 손에 들린 삼각 김밥의 비닐 소리가 유난히 서글프게 바스락거렸다.
집이 두 채라는 건 기쁨이 두 배가 아니라, 책임져야 할 입이 두 개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제 겨우 도장 하나 찍었을 뿐인데 내 인생의 옵션에 유령 부양이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