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비용은 감정을 앞지른다.

결국 영수증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by 오로라

이사는 추억을 정리하는 낭만적인 행사가 아니다.

내 인생의 무게가 정확히 몇 톤인지, 그 무게를 옮기는 데 얼마가 드는지를 숫자로 환산하는

꽤 잔인한 과정이다. 마치 내 삶을 통째로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 같다.


10년 동안 우리 가족의 체온이 밴 빌라의 거실은 짐이 빠져나가자마자 낯선 얼굴을 드러냈다.

가구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마다 남은 자국을 보며 잠시 멈춰 설 법도 했지만, 감상에 젖을 틈은 없었다.

다음 계산이 나를 재촉하고 있었으니까.


현관문을 닫자 "띠리릭" 하고 도어록이 잠겼다.

보통의 이사라면 해방을 알리는 소리였겠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문은 닫혔는데, 그 안의 빈 공간은 여전히 내 책임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고마웠어. 안녕..'


마음속으로는 작별 인사를 건네면서도, 동시에 관리비와 세금, 대출 이자가 머릿속에서

나란히 줄을 서고 있었다. 감정과 숫자가 같은 속도로 퇴장하는, 아주 현실적인 이사였다.


이날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눈물짓는 것이 아니라,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이사 비용, 사다리차 추가금, 정리해야 하는 세금들. 통장의 숫자가 빠져나갈 때마다

'아.. 이게 인생의 무게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이번 이사를 앞두고 우리 집 가전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

특히 10년 넘게 젖은 빨래를 책임졌던 건조기는, 이삿짐 박스가 거실을 채우기 하루 전 조용히 작동을 멈췄다. 마치 할 일을 다 했다는 얼굴로..

새로운 공간보다는, 정들었던 이 공간에서 생을 마감하겠다는 선택처럼 보였다. 손뼉 칠 때 떠나는 법을 아는 노병 같아서 괜히 마음이 쓰였다.


냉장고도 비슷했다. 새집에 빌트인 냉장고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기라도 한 듯, 이사 당일 아침 마지막 냉기를 털어내며 비워졌다. 낡은 시절의 흔적은 여기 까지라는 신호 같았다. 덕분에 새 물건을 들이면서도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남았다.


점심 무렵, 우리는 아파트 근처에 하나뿐인 콩나물 해장국 집으로 향했다.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갈 넘기자,

이삿날의 소란이 잠시 가라앉았다. 허무함은 씻겨 내려가고, 대신 앞으로 살아갈 현실의 짠맛이 남았다.


잠깐의 휴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 비밀번호를 설정했다. 잠시 옛집의 번호를 누를 뻔했지만, 곧 새로운 숫자를 입력했다. 확인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 다시 비밀번호를 눌렀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생경하면서도 묵직했다.

손가락이 새로운 질서를 입력하자,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집으로 들어서자 겨울 햇살이 거실로 쏟아지고 있었다.

비록 통장은 가벼워졌지만, 새로운 날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짠맛 나는 현실을 뚫고 들어온

이 낯선 호사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영수증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일단은 이 반짝이는 햇살부터 마음껏 들이켜고 싶으니까.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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