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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ythingbut Dec 15. 2023

훗날의 감정들

영화란 꾸며낸 세상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 해도 연기자의 몸을 빌린 표현이며, 실제의 인물을 비추더라도 편집의 과정을 거친다. 100프로 오렌지임을 강조하는 주스가 가공품인 것과 같은 이치다.


또한 대부분의 영화는 온전한 거짓이기도 하다. 결국 영화를 본다는 일은 눈과 귀에 허구를 담는 일이다.


이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나는 반쯤은 허구의 세상에 기대어 생존해 왔다. 단순히 재미가 있어서라고 말하기에는 과할 정도로 그 세계를 신뢰해 왔다.


사랑에 빠져서 별의 별게 다 타당한 이유가 되는 양 떠들어대는 마음으로 나는 영화의 이점을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연기’에 대하여 사유해 본다.






나는 영화 속 인물들을 주변인보다도 더 미스터리가 없는 존재로써 친근히 여겨왔다.


우선 그들은 작다(노트북이나 아이패드의 작은 화면 속에서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러모로 작다. 어느 방향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도 머리에서 발끝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때때로 클로즈업이 되어서 화면 가득 표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눈동자이기도 하고, 입꼬리이기도 하고, 미간에 잡힌 주름이기도 하다. 강아지의 꼬리가 된 마냥 혹은 아이가 된 마냥 무엇도 감추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악당마저도 유순히 카메라의 시선에 머문다. 덕분에 그들은 ‘솔직히 말하면,’하고 운을 떼는 이보다도 거짓이 없었다. 


허술하지만 믿어도 좋을 인물이 되어서 자신을 보여줄 뿐이다. 무표정한 등에서도 표정이 보일 정도로 바짝 다가온다.





무엇이든 최초가 있다면, 그것은 뽀네뜨였다. 엄마를 잃은 네 살짜리 여자아이였다. 작은 얼굴로 울먹이다 보채는 표정 속으로 나는 빠져들고 말았다.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것이 영화 속 상실을 향한 것인지 나를 향한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많이 울어버렸다. 


몇 살 때 본 영화인지도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감정만큼은 진짜라는 생각을 오래간 간직 해왔다. 


그렇다. 거짓의 세계 속에서 생동하는 감정들은 진실했다. 물리적 세상에서는 감히 표출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그 세계에서 용인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나 어떤 진실보다 더 강력했다. 


감정이라는 것이 영화를 볼 때마다 자라났다. 마치 비례관계에 있는 공식처럼 깊숙이 뱃속에 닿았다. 힘겨운 시간을 함께한 동료처럼 아주 친근히 나의 곁을 머물렀고, 나는 보아온 영화들을 통해 나의 마음을 거꾸로 쫓을 수도 있었다.


나란히 평행선을 그려온 감상은 이제 중년의 여배우들에 이르렀다. 


나는 도자기로 빚은 듯한 스무 살 무렵의 아름다움을 뒤로한 채 나이 든 얼굴로 연기를 해나가는 ‘줄리엣 비노쉬’를 보고, 능숙하게 말투를 바꾸어가며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펼치는 ‘매릴 스트립’를 보고,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에 출연하는 '이자벨 위페르'를 본다.


자유롭게 몸과 마음을 넘나드는 그녀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이 듦이 무섭게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나이를 들어가는 일은 고목처럼 굳어가는 것이 아니라, 드넓은 감정을 호흡하는 일일 수도 있다고 믿을 수 있게 된다.


만일 미숙하여 자라나지 못한 감정들이 있다 할지라도 또 다른 위로가 존재했다. 배우 '이정은'은 익숙해진 무감각으로 제 감정을 모르고 살다가 어느 순간 본능처럼 튀어나오는 분출을 정말로 잘 표현한다. 돌이 켜보면 보통사람의 보통의 감정들이 대게는 이런 모양새이다. 나를 포함한 생각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감정에 서툴다. 알아채는 일에 그런 것인지, 단지 표현이 그런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훗날의 나의 감정을 그녀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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