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유가 똑 떨어졌다.
때는 일요일이었다.
하루 종일 집에서 뭉개겠다는 심산으로 세수는 건너뛰고, 양치질만 했다.
그렇지만 부엌에서는 물세척에 열을 올렸다. 저녁으로 먹을 새우젓-두부찌개의 야채들을 씻고, 바질잎을 물에 담가 두었다. 다음 주에 먹을 바질페스토를 만들 요량이었다. 잣은 프라이팬에 슬쩍 볶아 올려두었고, 바질잎은 커다란 채반에 둘로 나누어 물기를 빼주었다. 그리고 파마산 치즈는 남편을 동원하여 갈았다.
준비가 끝난 재료들을 믹서에 넣고 갈면 되었다. 바질페스토를 만들어두고 찌개나 바글바글 끓여 먹으면 등 따습고 배 따스운 일요일 저녁이 완성될 터였다.
... 그런데 순간 정적이 흘렀다. 올리브유가 모자랐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도 턱없이 부족했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주아주 커다란 틴케이스에 담긴 대용량 올리브유였다. 나는 그것을 쓸 적마다 어느 석유국의 국민이 된 양 기름 걱정은 싹 잊었다. 써도 써도, 듬뿍 써도 끝없는 유전처럼 샘솟는 바람에 올리브유를 아껴야겠다거나 여분의 올리브유를 사둬야겠다는 생각자체를 자연스럽게 소멸시켜 버렸다.
바로 '그' 믿음의 올리브유가 드디어 바닥을 보인 것이다. 하필이면 바질페스토를 만드는 날에, 하필이면 집 근처 마트마저 문을 닫는 두 번째 일요일에.
황급히 올리브유를 살만한 곳은 근처 아웃렛의 식품코너 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따듯해진 겨울날이었지만 나는 두툼한 패딩으로 씻은 척 위장을 했다. 온몸이 후끈 더웠지만 볼이 더 붉어졌다. 우리(남편과 나)는 아웃렛의 기나긴 주차 행렬을 보며 어제도 마트에 다녀왔음을 아쉬워했다 - 바질페스토 파스타에 쓸 꼬불꼬불 프실리를 사러 갔었었다.
'올리브유는 무한대'라는 공식이 머리에 싹트지 않도록, 내용물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병에 담긴 이탈리아산 올리브유 하나를 달랑 사 왔다.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는 무한대라는 환상을 말끔히 접지는 못했다.
침대 옆 협탁에는 스탠드가 있다. 혼자 살 적부터 방에 두고 쓰던 것이다. 사각형태의 원목 위로 전구 하나를 끼우는 심플한 디자인이다. 덕분에 그 어떤 조명보다 전구의 존재감이 우람하다.
바로 그 전구가 십 년째 빛을 내고 있다. 누군가 몰래 새 전구를 갈아 껴 놓은 듯 같은 크기로 같은 반응으로 주변을 밝힌다. 준비해 둔 여분의 전구가 무색할 정도이다. 딸깍 스위치를 누르면 어제처럼, 그제처럼, 그끄제처럼, 어둠보다 따스한 주황을 방 한가득 채워 넣는다.
당연한 이치로 언젠가는 빛을 잃겠지만, 그날이 오면 나의 마음은 알 수 없게 동요할지도 모른다.
무한함은 유한한 생을 사는 인간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무엇이다.
생을 전제로 무한함을 펼쳐 넣는다면, 환생정도가 도출된다. 영원히 죽지 않는 일 따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물론 환생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흥행공식처럼 쏟아져 나올 때면 나는 진부함을 지적하지만, 솔직히 나도 모르게 '다시 태어나면'이라는 말을 남몰래 마음에 담았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아기처럼 말간 새 삶에 욕심을 낸다(현재형이다).
지금껏 애써 살아온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이번 생에는 조금의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새로운 가능성들을 들먹이게 된다. 그러고는 희망에 부푼 아이처럼 웃는다. 하지만 짤막하게 스치는 허구의 끝에서는 늘 정색하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러고는 똑같은 다짐을 반복했다. 기필코 이번 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다시 태어나자!
찬란히 아름답기보다는 쓰라리게 아팠던 일들을 모른 척 망각하지 않고 다시 살아내고 싶었다. (잘은 몰라도) 그래야만 절대적인 법칙을 거스르고 섭취한 '무한함'을 유의미하게 만들 것만 같았다. 또다시 펼쳐진 세상에서 만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어떠한 실수를 범하지 않는 새로운 나를 맛볼 수 있을 테다. 그건 아마도 쓰디쓴 원두의 단단함 뒤로 척 감기는 오묘한 단맛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