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보았다.
실내농구장이 달려있는 건물의 영화관이었다. 농구를 배우려는 아이들의 사뭇 진지한 움직임과 바닥에서 공이 튕겨 올라오는 활기를 뒤로하고 영화를 보러 이동했다. 화장실 뒤로 숨은 작은 상영관에는 일곱여덜 명 정도가 듬성듬성 자릴 잡았다. 팝콘을 먹는 소리도 기침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덕분에 나는 어렵지 않게 하마구치가 구사하는 깊은 무중력의 세계에 잠겨 들 수 있었다.
두어 시간이 지나, 나는 우동을 만들 때는 물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것들을 느끼며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개봉한 지가 얼마 되지 않는 탓에 아직 관람을 하지 못한 이들도 많을 테니 세세한 소감은 생략한다.
영화관에서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어떠한 시기 동안은 주로 팝콘과 콜라가 어울리는, 가벼운 영화들을 보았다. 어쩌다 그러한 불상사가 발생하였는지 몰라도, 그때는 고민하고 결정할 일들이 넘쳐나서, 깊은 사색을 유발하는 영화가 영 스미지 않았다.
집에서도 넷플릭스로 몰입감이 주된 시리즈물을 보았다. 이따금 무게감이 있는 영화를 찾아보더라도 일시적이었을 뿐, 길고 꾸준하게 이어지지가 않았다. 넷플릭스를 탈탈 털어 더는 볼만할 게 없어질 때까지 나를 소진시키고서야 나는 다시 어떤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즈음에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베드타임-무비로 <해피아워>를 골랐다. 제목만으로는 온화한 느낌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여자 넷이서 맛있는 음식을 노나 먹으며 우정을 쌓는 그런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영화는 미묘한 기류를 타고서, 워크숍씬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생소한 장면이 시각적으로 드러났다.
서로에게 등을 마주 기댄 채 앉아있는 두 사람이, 서로의 등에 자신의 무게를 기대어 동시에 일어서는 것이었다. 순간 두 눈을 의심했다.
마음에서 막연히 일렁이던 것이 몸의 동작으로 표현된 듯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할당량을 절반씩 나눈 순조로운 대화처럼 보이기도 했고, 애정을 동등하게 주고받는 모범적인 사랑처럼 보이기도 했다.
만일 인생에서 그러한 장면만 펼쳐진다면, 어려움이 반으로 줄어들 테다. 나는 한시라도 더 깊이 영화 안으로 침입하여, 간접적인 무언가를 체험하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는 다시 방향을 틀어 실제에 가까운 관계들을 파고들었다.
준에게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다. 워크숍을 경험한 날 그녀는 말하고 싶어 졌다고 하며, 불쑥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아카리는 자신에게 비밀을 둔 일에 화를 낸다. 그녀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상대를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번번이 자신의 잣대어 상대를 파악하는 탓에 제대로 듣질 못한다.
기혼자인 후미와 사쿠라코 역시 어떤 말들을 배우자에게 생략한 채로 살아간다. 그것들을 자각하고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순간, 관계의 양상이 달라진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위태로운 단절의 지점들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와도 무관하지 않았기에 나는 무너지고 마주하기를 반복하며 중심을 잡아갈 수밖에 없다는 영화 속의 말을 되감으며, 하마구치 류스케의 이름을 외워둘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드라이브 마이카>를 보았다.
전작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탓인지, 마치 <해피아워>의 연작처럼 다가온 영화는 돌연 아내를 잃은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어느 날 아내는 할 이야기가 있다며 그를 부른다. 하지만 집에 도착해 보니 아내는 죽어있었고, 그는 아내가 하려던 말을 들을 수 없게 된다.
그는 다시 운전을 하고, 연극을 연출하는 자신의 일을 해나간다. 하지만, 무언가가 달라졌다. 그의 차량을 대신 운전해 주는 상대가 생기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하여 아내의 내밀한 이야기를 듣게 되기도 한다. 차이가 있는 반복들이 펼쳐지며 그는 어느 지점에 다다른다. 비록 연극의 한 장면이었지만, '언어화된 음성은 끝내 서로에게 닿지 못했지만, 마음이 발하는 제스처는 서로에게 닿았다'는 위안이었다.
역시나 길고 긴(해피아워의 러닝타임은 328분, 드라이브마이카의 러닝타임은 179분이다)의 하마구치의 영화들은 줄이면 뭔가 시시해지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그 위안을 기점으로 못다 한 말들을 더 자유롭게 끄집어낼 수 있었다.
분명 영화를 통하여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사람은 감독인 하마구치 류스케였는데, 신기하게도 나의 내면의 말들이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의 뱃속에는 궁극적인 말들이 담겨 있는 듯하다. 심층적인 마음의 표현 같은 것이 있는 셈이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향해가려고만 한다. 가까운 이에게 성큼 다가가 괴로움과 슬픔과 외로움을 고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염없이 털어놓고 공기처럼 가벼워지고 싶을 테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지속적으로 그 일을 실패해 온 것 같다. 말의 무능이기도 하고 관계의 무능이기도 했다. 여전히 그것들은 진행형으로 남아서 내면에 자국을 남기지만, 하마구치 류스케의 언어 안에서라면 방향을 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