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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ythingbut Mar 27. 2024

객관의 세계


#첫_에스프레소


나는 압구정의 커피빈에서 알지도 못하는 음료를 주문했다. 맞은편 자리를 비워둔 채로 작은 잔을 마주했다. 오직 우리 둘 뿐이었다.


입술에 닿아 혀를 스치는 검은색에 가까운 액체의 맛이 어떠했는지 세세히 묘사할 만큼의 기억은 없지만, 그것은 검었다. 쓰다고 정의될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도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한낮의 카페에서 왜 소주를 마시냐는 질문들을 들어가면서도 작은 잔들을 비워냈다.


당시에는 어떠한 슬픔이 있었고, 나에게는 그것을 타인에게 적당히 울먹이며 말하여 보는 능력이 부재하였으므로 에스프레소는 일종의 위안이었다. 씁쓸함을 알아채고 씁쓸함을 흉내 내어주는 드문 존재였다. 


‘검은 것은 검다/ 슬픈 것은 슬프다.'는 가감 없는 위로를 홀짝홀짝 들이마셨으니, 어떠한 면에서는 에스프레소는 우아하며 힙한 소주이기도 했다. 만일 커피 애호가에게 에스프레소에 대하여 묻는다면, 그것은 다채로운 맛이 응축된 검정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유독 그 씁쓸함을 좋아했다. 더 정확히는 구태여 씁쓸함을 감추지 않는 태도를 더 좋아했다. 


#이상형


한때 나의 이상형은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남자이기까지 했다. 그런 상대라면 세상의 어떠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상당히 담대한 면모가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제와 글로 쓰고 보니, 무척이나 허술한 인과관계이다. 그래서인지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이상형에 가까운 남자를 사귀어본 적도, 만나본 적도 없게 되었다. 


괜히 남편에게 이상형을 언급하였다가 놀림거리만 늘어났다. 


꿈결 속의 '에스프레소의 남성'은 폴 오스터나 알베르 카뮈처럼 본질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을 소유하고 있는데, 남편은 다소 추레한 느낌의 무언가 허세가 가득한 표정을 지은 남자들이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마다 네 이상형이 티브이에 나왔다며 쿡쿡 놀려대기 바쁘다. 사실 가까운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에스프레소의 이면에 존재하는 - 지나간 - 말들이었지만, 결국은 에스프레소와 이상형이라는 단어 한 쌍만이 소통의 오류처럼 전해지고 말았다. 


#장마


115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가 하늘에서 땅으로 쏟아진 여름이었다. 어마무시한 수해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우리 집에도 그것의 여파가 미쳤다.  


끈끈한 장마철의 더위를 이겨내며 겨우 잠에 드려던 순간이었다. 선풍기가 힘없이 주저앉아버렸다. 원을 그리며 팽팽 돌아가던 날개들이 멈춰버렸다. 단순한 방전이나 오작동을 의심하며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선풍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각종 가전에서 미세하게 새어 나오던 빨강 혹은 초록의 점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동굴 안에 홀로 남겨진 듯한 정전의 시작이었다. 


영화나 드라마로 갑작스러운 정전에 대한 불안을 잊어보려 해도, 아이패드 상단의 간당간당한 배터리모형이 더 크게 마음을 차지했다. 좀처럼 감기지 않는 눈꺼풀 속으로 걱정이 몰려들었다. 고심끝에 산 복숭아 한 상자와 야심 차게 담근 양배추 김치 한 통. 


최악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냉기를 잃은 냉장고 안에서 그것들은 맛있게 후숙 되거나 숙성되지 못한다. 나는 여름을 잃은 심정으로 핏빛 복숭아와 양배추 김치를 쓰레기 봉지에 담는다. 

 

불운이 기필코 자라날 듯한 밤이었다. 


밤부터 이어진 세찬 빗줄기 사이로 아침이 희미하게 찾아왔다. 그러나 정전의 연장선상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둘러보니 군데군데 형광등 빛으로 가득한 거실들이 하얗게 보였다. 하필, 우리 동에만 일어난 정전 사태였다 - 특수한 불행이었다.


허기가 복받쳐 올라왔지만 먹을 만한 게 없었다. 최대한 냉기를 유지시켜야 하는 냉장고의 문을 열 수도 없었고, 가스마저 차단되어 라면하나 끓여 먹을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때 처음 안 사실인데 전기가 나가면 가스도 자동으로 차단된다.


창이 없는 화장실에서 어둠어둠 씻고, 에너지원을 잃은 측은한 전자기기들을 부랴부랴 가방에 챙겨 넣고서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전기가 나간 거주 공간은 비바람을 피하는 동굴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콘센트가 있는 가장 가까운 곳으로 걸어 나갔다. 롯데리아였다.


창가에 앉아서 새우버거를 먹고, 차분히 관리사무소에 문의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첩첩산중이었다. 언제 복구가 끝날지 장담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내일도 떠돌이 신세일테다. 


비상사태를 감지한 두뇌가 에스프레소를 생각해 냈다.


별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나는 전기기술자도 아니었고, 예언자도 아니었다. 복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어느 아파트 단지의 주민일 뿐이었다. 


있는 힘껏 에스프레소에 집중해야 했다.


#객관의_세계


독일의 감독 다르덴 형제가 만드는 영화에는 감정을 고조시키는 음악이나 합을 맞춘 화려한 액션 씬이 없다. 현실의 소리들과 아이처럼 유치한 어른들이 몸싸움이 곧이곧대로 화면에 드러난다. 매 장면이 다큐멘터리 같아 세상을 거울처럼 비춘다. 하지만, 감독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시간가량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다 보면 무심코 지나쳤을 일들이 세세히 느껴진다. 작은 사람들의 선의나 의지였다. 영화의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면 울컥 위로가 찾아든다.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지만, 쓴맛을 쓴맛으로 보답하는 에스프레소도 비슷한 작용을 했다. 벗어나려고 애쓰던 씁쓸한 맛이 막상 끝에 닿으면 객관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날도 에스프레소는, 검고 곧은 선으로 109동의 1,2호 라인의 주소를 호명하며 봉지를 받아 들고 햄버거 집을 나서는 배달원들과 수해에는 패스트푸드라는 양 햄버거를 먹는 이웃들을 그려내며, 특수한 불행으로 유발된 감정들을 크기에 걸맞은 잔에 담아주었다. 


집으로 돌아가, 전기가 돌아온 냉장고 문을 열으니 미미한 찬 기운이 감지되었다. 딸기맛 스크류바는 납작이 형태를 잃었지만, 양배추와 복숭아는 제 크기에 걸맞은 달콤함을 유지했다.  


#퍼스널칼라


위로에도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이 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불안에는 카페인이 금기시되는 바람에 선뜻 슬픈 누군가에게 커피를 권하지는 못하겠지만, 나에게 어울리는 바탕은 에스프레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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