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순 작가님의 '굴러가 어쨌든'을 소개합니다.
어떤 아이디어를 들어도, 안 될 이유를 먼저 생각하곤 했다. 리스크를 잘 파악하는 게 내 장점이었다. 문제는 내가 일하는 분야가 '광고'였을 뿐이었다. 인턴 때부터 그랬다. 가볍게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자리에서 나는 '안될 이유'를 제시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 자리가 '가볍게 아이디어를 던지는 자리'였을 뿐이었다. 아이디어를 구상할 때에도 나는 현실적인 부분을 잘 캐치하고 환경과 상황에 따른 어려움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내 직업이 '아이디어를 내는 일'이었을 뿐이었다. 아이디어를 깎기만 하는 사람,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을 맡고 있는 사람이 나였을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모든 일은 준비가 필요하다.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문제를 미리 대비하는 것은 몇 번을 강조해도 될 만큼 중요하다. 그런데 리스크에 온 힘을 집중하고 있으면, 정말 신기하게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반복으로 체득한 공포였다. 애초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거라는 나의 생각이 오만이라는 듯,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준비 속에서도 항상 사고는 터졌기 때문이다. 광고 일 뿐만이 아니라 삶에서도, 사랑에서도 완벽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하늘 높이 올렸다가 무너뜨리곤 했다.
집순 작가님의 <굴러가 어쨌든>을 만난 건 올해 9월이다. 그때의 나는 2년을 가득 채운 취업 준비생이었고 엊그제 이별을 통보받은 실연남이었다. 단지 그 2년 동안 200번의 입사 지원과 30번의 면접, 그리고 5번의 최종 면접에서 거절당했을 뿐이었고, 몸과 시간을 던져 상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부담이 된다며 차인 상태였을 뿐이었다. 더 이상 인생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싶지 않다고 느낄 때쯤, 브런치 북이 말을 거는 기분이었다.
"야, 뭘 그렇게 좌절하고 앉아있어. 굴러간다니까 어쨌든?"
"운전은 잘해요?" 한 자동차 회사의 최종 면접장에서 들은 질문이었다. 면허는 있다. 운전은 해본 적 있다. 한 8년 전쯤... 운전을 해본 적은 한 손가락에 꼽히는데, 면허는 갱신했다. 그때 운전을 잘한다고 대답했으면 면접 결과가 달라졌을까? 아니, 운전을 잘했다면 그 날의 면접이 달라졌을까 생각한다. 그녀와 데이트를 할 때에도 그랬다. 새벽에 갑작스럽게 보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내가 차를 끌고 나갈 수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면허를 딴 지 10년이 됐으니 갱신을 하라는 통지서였다. 면허? 면허를 어디에 뒀더라. 한참을 찾다 보험증서, 임대차계약서 따위를 모아둔 파일철 속에 쳐박혀있는 걸 발견했다. 발행연도 2008년. 운전대 한 번 안잡았는데 10년이 가버렸다."
집순, 굴러가 어쨌든 中
운전을 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했다. '할 필요가 없어서.' 그렇게 10년쯤 지나니, 나도 분명 운전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그럼 하면 될 것을 이제는 '운전할 준비가 안돼서.'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필요가 없던 일이 하지 못할 일이 되었다. '면허'를 제외하고 운전에 준비가 어딨을까 싶으면서도 장롱에 담아뒀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자격을 잃은 느낌이었다. 따지고 보면 서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혼인 신고서가 사랑을 증명하는 게 아니고, 근로 계약서가 성실을 증명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나는 늘 어엿한 어른의 조건은 운전이라고 생각했다."
집순, 굴러가 어쨌든 中
29살이 되니 주변 친구들은 모두 차가 있었다. 취업을 한 지도 오래였고, 안정적인 연애와 결혼을 한 친구들도 많았다. 모두가 어른이 되는 세상 속에서 나 혼자 조금은 뒤쳐진 것 같았다. 겉으로는 "나는 나의 목표와 커리어를 사랑해."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어른이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불안이 가득했다. 2년의 취업 준비가 그렇다. 그냥 일을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어떤 목표에 취해서 취업 준비생으로 살았는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던 것들 중 '운전'이 있었다. 여행을 가서도 뒷자리에서 바로 곯아떨어져버리는, 친구들끼리 돌려가며 운전대를 잡을 때 혼자서만 장롱면허를 위시하며 편하게 여정을 즐기는 내 모습은 '어른'은 아니었다. 어른이라는 면허만 있을 뿐이었다.
"이 도로에서, 아니 내 인생에서 나를 가게하고 서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하나 뿐이다."
집순, 굴러가 어쨌든 中
더 이상 운전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동생에게 부탁해 간이 연수를 받았다. 그러고 보면 동생은 참 성실했다. 휴학과 방황 한 번 없이 학교를 졸업하고, 단단하게 취직하고 또 잘은 모르지만 안정적인 연애도 하고 있는 듯했다. 주말마다 가족을 이끌고 드라이브를 나가는 동생의 곁에서도 '운전을 배워야지.'라고 마음만 먹었던 내가 부끄러웠다. 몇 번의 위험과 긴장을 건너뛰고 나서야 나는 목과 어깨에 힘을 뺄 수 있었다. 2012년식 소나타는 여전히 잘 굴러갔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잘 굴러갔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굴러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저 나 혼자 '아직 준비가 안됐다'는 핑계를 대며 엔진을 꺼 둔 것이었다.
자동차 운전에 성공하고 난 주말,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전부터 내게 취업 제안을 줬던 회사에서 일하겠다고 회신했다. 운동엔 젬병이지만 달려진다 어쨌든, 처음 해보는 인사와 조직관리지만 회사는 돌아간다 어쨌든. 절대로 죽어도 못 지나갈 것 같던 나의 아홉수도 그렇게 지나갔다. 굴러가는 것이었다. 어쨌든.
"절대로 죽어도 못 지나갈 것처럼 험준하고 협소해 보이는 길도, 남들 다 다니는 길이랍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갈 수 있어요. 갈 수 있을 거예요."
집순, 굴러가 어쨌든 中
초여름, 퇴근길에 그녀가 내게 전화를 걸어 데이트를 신청했던 날을 기억한다. 예정에 없던 약속이라 씻고 준비하고 이동하는 두 시간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우물쭈물하다 그녀에게 실망을 안겨줬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그때의 나에게 한 번은 말해주고 싶다.
"일단은 나가자. 행복할 거야,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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