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린 모두 친구이다.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을 읽고

by 최광래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하루를 뿌듯하게 보냈다가도 밤이면 드는 생각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어쩌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죽는 게 아픈 것이라 살아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죽음은 아픈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죽는 과정이 아픈 것이다.


내가 글을 쓰기로 한 순간은 죽음을 실현하고자 했을 때이다. 화려한 껍데기(그다지 화려하지도 않았지만)를 벗고 나니 텅 비어버린 감각이었다. 책임, 명성, 지식 등 사회의 것들을 다 버려낸 일이다. 초라한 나체의 영혼으로 거울을 마주하고 있으면 '볼품없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하곤 했다.


나의 계기를 부정하고 싶어서 어떤 사람들이 꾸준히 글을 쓰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우울할 때 글이 잘 써진다. 슬픔이 나의 글감이 된다. 희망을 보더라도 깊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는 일이 익숙하다. 아프고 어려울수록 글이 잘 써지는 것이다. 감정을 표출하는 데 서투른 나는 글에서만큼은 있는 힘껏 감정을 내비칠 수 있었다. 슬픔이 가득한 글을 쓰는 것은 그만큼 내가 슬픔을 내비치지 않는 데서 기인했다.


그런데 소설가들은 왜 그리 비운의 삶을 사는가, 시인들은 왜 그렇게 외롭게 죽어가는가. 역작을 남기기 위해서는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것만 같았다. 생전의 영광을 누린 글쟁이는 어디 있는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처럼 쓸 수 있다면 좋겠다만, 나는 고작해야 내 삶을 조명하기에도 부족한 백열전구 하나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슬아를 알게 됐다. 나는 92년생만 보면 그렇게 마음이 들뜬다. 같은 해에 태어나 삶을 살아가는 친구들에게 마음의 독려를 얻는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가 한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준다. 어리면 어린 대로 재능이 부럽고, 늙으면 늙은 대로 연륜이 부러운 내게. 동갑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적절한 비교가 되어주었다.


이슬아는 행복해 보였다. 글을 쓰면서도 불행하지 않아 보였다. 슬픔과 어려움을 글로 써내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았다.(실상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글을 쓸 때 기쁨과 사랑을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됐다. 나는 글을 쓰고 싶지만, 우울하고 슬프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슬아 작가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의 글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의 생각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조금은 다르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항상 매력적이었다. 형태가 본질을 바꿀 수 있다면 이슬아의 글이 그랬다. 그가 내비치는 부끄럼과 당당함이 메시지의 호불호를 무위로 돌렸다. 나는 이슬아의 생각은 좋아하지 않지만, 이슬아의 글을 좋아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어머니를 '복희'라 부른다. 스승을 '어딘'이라 부른다. 높낮이를 스스로 조절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스승이라 부른다. 내가 위로받기 위해 선택한 동갑들의 지평을 이슬아는 더욱 넓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1년을 365일로 정한 것뿐인데, 나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구분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영어 호칭을 쓰는 회사에서 근무한 기억이 있다. 사장님을 이름으로 부르고 팀장님을 부를 때도 '님'호칭을 쓰지 않았다. 모두가 존대를 하지만, 호칭만큼은 이름으로 불렀다. 외국계처럼 보이고 싶은 허례허식이라 느꼈는데, 효과는 꽤 좋았다. 보고가, 피드백이, 의견 조율이 편해진다. 허울뿐인 의식일지라도 호칭이 가져다주는 변화는 유의미했던 것이다. 겪어보기 전엔 몰랐던 일이다. 그때 이후로 수평적인 조직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런 관심이 지금의 일을 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어리다고, 나이가 많다고 구분하던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나. 동갑이라는 체계는 누가 정한 일이었나. 바다 건너 미국이었으면 모두가 친구라고 부르지 않았겠나. 그렇다면 수십억 지구의 삶 중 짧디 짧은 인간의 역사에서 나는 고작 몇 년으로 차이를 두려 했는가 부끄러워해본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 친구라고 그가 말했다. 그러니 나는 이슬아뿐만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친구들에게 동력을 얻어야겠다. 어리다고 질투하지 않고, 나이 들었다고 연륜을 의식하지 않아도. 배울 게 있다면 배우고, 알려줄 게 있다면 알려주는 친구가 되고자 한다. 그것이 새로운 행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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