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만을 고집하지 않아도 될 이유
아버지는 얼마 전까지 자아실현이라는 단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셨다. 22살 군대를 전역하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서울 생활을 시작한 지 40년 째, 아버지에게 직업은 월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단어였다. 그저 한 달 한 달 봉투에 받는 월급에 가치를 두며 살아오신 아버지의 우직함이 지금의 우리 가정을 만들었지만, 그 속에 아버지 자신의 가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일은 노동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월급을 받는다는 철저한 직업의식은 모든 가치를 연봉으로만 판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나름대로 화목한 우리 가족의 유일한 고민은 돈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월급으로는 학원비가 부족하다는 말을 몰래 듣고는 학원을 안다니겠다 선언해버리곤 했다. 가정 주부셨던 어머니의 근로 이유도 오직 돈이었다. 돈을 더 벌기 위해 일을 하는 부모님 밑에서 나는 자연스레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 되었다. '연봉 1억을 버는 사람이 되어야지' 직업이 아닌 연봉이 나의 꿈이었다.
학창 시절의 초반은 어떤 직업의 평균 연봉이 높은지를 따져보는 시간이었다. 흔히 말하는 '사짜' 직업들이 후보군에 올랐다. 별 다른 고민도 없이 공인회계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유로. 리스크를 생각하지 않은 채 2년의 시간을 수험 생활로 바쳤고 나는 그렇게 시험에 떨어진 사람이 되었다.
다행히 마음은 꺾이지 않아서, 나는 취업으로 목표를 돌렸다. 그렇게 굴지의 대기업 세 곳의 최종면접을 보았고, 모두 떨어졌다. 무엇이 문제인 걸까. '그냥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것 뿐인데.'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친구들은 모두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짐 캐리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자기 아버지는 돈을 선택해, 꿈이었던 코미디언을 포기하고 회계사를 하셨는데, 그 일조차 돈을 많이 벌어다주지는 못했다는 인터뷰. 연봉만을 생각하며 다른 것들을 포기했음에도 실패했다는 말이 머리에 계속 남았다. 그래, 나도 그렇게 실패했었지. 그렇게 포기한 것들이 머리속에 지나갔다.
부장이 되도록 헌신해야 받을 수 있는 연봉 1억, 그마저도 세후로 따지면 월 600만원 수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월에 600만원도 못 벌 인생이 갑자기 안타까웠다. 그토록 재미 없던 세법 공부가 이런 계산에는 도움이 됐다는게 우스웠다. 다 포기해도 600만원도 어렵다는 게. 반대로 말하면 포기하지 않아도 기회비용이 크지 않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2년 간의 취업 준비 기간 동안 200번이 넘는 자기소개서를 썼다. 그 속에는 '연봉'이라는 지원 동기를 감추기 위한 많은 미사여구들이 넘쳤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를 가린 자기소개서는 '자기소개서'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글을 좋아하는 나도 없었고, 소년만화를 보며 매일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내가 담겨있지 않았다. 9년의 대학 생활이 남긴 깨달음 치고는 약간 작아보였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빠져나온 나를 자랑스러워 해 본다. 계속 연봉이라는 목표에 묶여 나를 가둬두고 있었을 나를. 이제라도 자유로운 초원으로 풀어놓아본다. 연봉이라는 목표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가치가 나를 포기할 정도로 대단한 것인지 계산해 볼 필요는 있어졌다.
계산기를 켜고 주 40시간의 직장인을 생각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회사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한다면, 여가 시간은 회복 시간이 되어야만 했다. 지친 하루를 풀어줘야만 하는 그런 시간. 결국 일이 즐겁지 않으면, 일상도 망가진다는 것을, 이토록 쉬운 계산을 지금까지는 왜 하지 못했을까. 마음 속에 담아뒀던 곳에 연락을 넣었다. 일하고 싶다고, 그 곳에서 즐겁고 뜨겁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수없이 많은 공고들을 지나쳤던 곳에 이제는 내가 먼저 메일을 보냈다.
다음 주면 면접을 보러 간다. 세상 무엇보다 박봉인 곳으로, 연봉만을 생각하던 스스로를 던져보기로 했다. 다시 한번 계산기를 켜 본다. 연봉 말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일을 하게 될까.
*몇 주 전에 쓴 글이라서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지금은 면접을 본 회사 중 한곳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