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기사님에게 주고 싶었던 여유의 시간
친구들과 함께 모여 놀 월세방(이하 아지트)을 계약한 지 삼일 차, 그 날은 아지트에 인터넷을 설치하는 날이었다. 설치 기사님이 3시에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마침 할 일이 없던 나는 당번으로 지목되어 아지트를 지키고 있었다. 3시 반이 넘도록 도착하지 않는 초인종 소리에, 조금 늦으시나 보다 생각하며 책을 읽고 있었다. 그렇게 기사님이 도착하신 시간은 4시 반이었다.
"죄송합니다. 일이 많이 밀려서요." 평범하게 늦은 사람의 인사였지만 편하게 들리지 않았다. 늦었다는 사실이 불편했던 게 아니라, 떨고 있는 기사님의 목소리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사실 할 일이 없었고 책을 읽을 계획이었던 내 입장에선 조금 늦어져도 괜찮던 일이었다. 여유가 있으니 기사님의 입장을 생각하게 됐고,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어떤 상황을 겪으며 이 곳에 오셨는지 신경 쓰였던 것이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설치를 시작하시는 와중에 기사님에게 전화가 한 통 도착했다. 통화 내내 기사님은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오히려 너무나도 떨리는 기사님의 목소리에 '지각에 타당한 이유가 있지 않으셨을까? 성실하신 분 같은데.'라며 스스로 핑계를 대 보았다. 재촉한다면 빨리 끝날 수도 있었겠지만, 조금 더 천천히 이곳에서만큼은 쉬어가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일부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의 서비스직 아르바이트 경험이 만들어 준 조언이었다. 안 그래도 불편할 마음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일순간 '침묵이 더 불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긴장된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무서웠던 기억이 난 것이다. 급하지만 티 나지 않게 조용히 물 한잔을 따라드렸다. 혹시 확인할 사항이 있다면 말씀해달라는 말을 곁들여서. 질문 몇 개로 간단히 설치 계획을 이해하고 자리로 돌아가 책을 마저 읽었다. 신경이 자꾸 기사님에게 쏠려서 책 내용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읽히지도 않는 책을 일부러 세게 넘기며 읽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기사님께 들리도록, 내가 책을 읽느라 침묵인 것이라고 이 침묵이 전혀 불편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침묵의 이유가 독서라고 생각해주시길 바라며, 책을 넘기는 소리를 크게 냈고 중간중간 중얼거려보기도 했다. 노력 덕분일까, 다행히 기사님의 긴장이 다소 풀린 것 같았고 시원하게 물을 원샷하시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도 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프레젠테이션 동아리에서 운영진까지 하다 보니, 화법에 대한 공부를 한 적이 있다. 신기하게도 발표의 기술을 다룬 책 중 침묵의 효과를 강조하지 않는 책은 없었다. 커뮤니케이션적으로 침묵은 상대를 의도적으로 불편하게 만들고, 불편은 신경을 자극해 나에게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자주 사용하는 기술이었다.
다만 굳이 우리가 일상에서까지 침묵을 통해 압박을 넣어야 하는지는 고민이 됐다. 조금 더 유연하고 여유 있어지면 좋지 않을까. 내가 급하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기사님을 재촉할 정도로 급한 일이 아니라면 그의 템포를 존중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일이나 공부를 할 때 옆에서 재촉하거나 감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템포가 어긋나게 되고, 그로 인해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니까.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러 이유로 필연적인 침묵을 선택해야만 할 상황이 온다. 할 말이 없거나 관계가 어색하거나 자리가 불편할 때. 그때 작지만 분명한 이유를 더해보면 어떨까. 책이 되었던 음악이 되었던 무언가. 서로의 사이에서 존재하는 침묵이 공허가 아닌, 각자가 시간을 즐기는 증거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