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쓰여야 하지만, 모두가 알아챌 필요는 없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아무튼 효율성이 떨어지는 작업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소설가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3p
어제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시험공부를 할 계획이었다. 내일 마감인 서류를 정리해두고, 여유롭게 커피 한잔을 할 계획이었는데. 망할 기억이 떠올랐다. 가끔씩 찾아와서 나를 부숴버리는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의 기억들. 이 녀석들은 매가 통하지 않는다. 상처를 주면 오히려 부어올라서, 더 크게 내 안을 채운다. 나는 그래서 일종의 당근으로 글을 쓰곤 하는데, 요컨대 찌질한 부분을 드러내는 글을 쓰거나 미련 같은 내용을 적곤 한다. 그 주제는 보통 취업이나 연애가 된다.
하지만 어제는 이 녀석을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글을 써서 달래고 자리에 앉으려 해도, 조금 더 주저앉아서 울자고 하지를 않나. 괜히 커피를 타다가 얼음에 눈을 두고 멍때리자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점심이 될 때까지 가만히 앉았다가 누웠다가를 반복하면서 천장에 그려지지 않는 것들을 그리고 있었다.
허무하게도 이런 기억을 날려준 것은 정오의 따가운 햇살이었다. 암막 커튼이 없어서 그대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 녀석들을 몰아냈다. 이런 날이면 저녁에 다시금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이 틈에 곳간에 당근을 가득 채워 두기로 했다. 글을 써야만 했다. 그런데 글감이 없었다. 전 회사에서는 감 농장이라는 걸 만들어서 콘텐츠로 풀어냈는데. 여지없이 감이 필요했다. 글감 말이다.
글을 좋아하다 보니 팔로워 중에서도 글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 몇 사람은 스토리로 제시어를 받아 글을 쓰곤 했다. 일종의 작문 놀이. 관종 같아서 두려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이따가 몰려온다니까?! 그렇게 5시간 동안 20편이 넘는 글을 썼다. 고작 서너 줄의 문장이었지만, 머리는 시렸고 팔목은 저렸다. 그래도 곳간에 가득 찬 당근을 보며 만족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말이란 것은 모든 사람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써야 한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반드시 쉬워야 하고 누구나 알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상업 영화는 낮게, 예술 영화는 높게 별점 준다?!' 中
퇴고할 시간 없이 바로 올린 글이라 허점 투성이었다. 구조도 이상했고, 주제의식도 없었으며, 오타까지... 아주 최악이었다. 특히 오타라니. 오타만큼은 안내는 게 몇 안 되는 장점이었는데. 친척을 친적이라고 썼다. 그래 가끔은 친척이 적이 되기도 하니까. 봐주자고 생각했다.
여지없이 좋다는 평가와 뭐 하냐는 평가가 동시에 날아왔다. 지인이 아닌 팔로워는 내 글이 좋아서 생긴 사람들이라 대부분은 좋다는 평가였고, 지인들은 어쩔 수 없는 팔로워라 그런지.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일도 많았다. 이런 면에서 왜 예술가들이 가까운 사람들을 싫어하는지, 책 속의 독자와 이야기하는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는지 조금은 공감했다.
그렇지만 애초에 SNS에 글을 쓴 건 내 책임이니까. 그냥 그런저런 조롱은 웃어넘겼다. 실제로 크게 와 닿지도 않았으니까. 누군가가 세심하게 써준 평론이라면 도움이 된다. 물론 상처가 되기도 한다.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행위는 누구에게나 아프니까. 그렇지만 대충 읽은 사람들이 대충 보낸 피드백에 상처 받는 것도 웃겼다. 모두가 좋아하면 좋겠지만 모두가 적당히 좋아하면 한편으로는 씁쓸할 것 같기도 하다.
예술가들은 작품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세상에 내놓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의 프로 의식이겠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무렇게나 글을 써내는 '다작가'에 가까울 것 같다. 예전엔 그저 부끄러운 사람이었다면, 언제부턴가 그냥 많이 쓰는 사람이 됐고, 요즘은 내 마음에 든다라는 감정이 뭔지를 배워가는 사람이 됐다. 이 끝에 내가 만족하는 나만의 걸작을 만드는 모습이 있었으면 한다. 아는 사람들은 미치도록 좋아하는 그런 느낌 말이야.
어제의 폭주 덕분에 곳간은 가득 찼지만, 밀린 서류와 시험공부로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마지막 순간에는 거의 글자를 읽기 힘들 정도로 하루 종일 글을 읽었고 썼다. 그래도 알 사람은 알아보겠지. 어제는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