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공부를 하게 된 날.

언제 그렇게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고.

by 파르르

어제는 모처럼 공부를 하겠다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준비하게 된 한국사 시험, 평생을 역사가 싫어 역사책도 안 읽던 제게도 시험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2주 간 꾸역꾸역 없는 지식을 쏟아부었지만 깊이가 부족했습니다. 숲을 보는 버릇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게는 그런 핑계가 있습니다. 큰 흐름만 보고 대충 넘어가는 버릇이죠.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소설이 어려웠던 이유입니다. 줄거리만 알면 다 읽었다고 생각해버리는, 디테일의 즐거움을 놓치던 제게 역사는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시험이라는 장치 덕분에 어제는 꼬박 밤을 새웠습니다. 20시간 정도 앉아있었을까요. 허리가 아픈 것도 잊은 채, 문제를 풀고 입으로 소리 내어 해설을 읽었습니다. 우습게도 20시간이라는 목표를 정한 것도 아니고, 입으로 소리 내며 읽겠다는 목표를 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공부를 할까 싶어서 자리에 앉았고 시험이 다가오는데, 모르는 부분은 많으니 앉아서 줄줄 외는 것이었습니다. 자리에 앉는다는 의지 약간과, 시험이라는 분명한 목표 덕분에 꼬박 20시간을 보냈습니다. 중간에 시계를 보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시간이 흐른 줄은 몰랐어요. 9시라는 알람 덕분에 알았습니다. 만약 알람이 없었다면, 시험장 입실 시간을 놓쳤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한국사겠지요. 물론 난이도가 그렇게 높은 시험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제 제가 느낀 감정은 오랜만에 느끼는 몰입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한다는 절차적 장치 없이, 단순한 목표와 단순한 의지로 이뤄진 엄청난 몰입.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서는 몰입을 한 경험들이 많았지만, 하기 싫은 일에서 몰입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아마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겠죠? 아마도 사람들(저처럼 하고 싶은 일만 몰입하던)은 급박한 상황을 이리저리 잘 피해왔거나, 급박한 상황을 그냥 보내주곤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기 싫은 일에서도 '몰입'을 할 수 있었고, 몰입은 즐거웠습니다. 막상 하면 다들 한다는 말은 이런 걸 의미하나 봅니다. 생각하지 않던 일도 몰입하니 재밌었고, 또 나름대로 할만했습니다.


결국 시험은 목표 점수를 못 채웠지만(부끄럽게도 한번 더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느낀 몰입의 즐거움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남겼습니다. 무언가 더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기 싫은 일도 집중해서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동이라는 가장 무거운 자물쇠가 남았지만, 그래도 열쇠 하나 정도는 들고 있는 기분입니다. 아마 그간 꾸준히 해온 웨이트 트레이닝이 도움이 됐나 봅니다.


여담이지만, 아는 후배는 "월요일 좋아."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일하러 가는 날을 매일 신난다고 표현하고, 야근하는 날을 즐겁다고 말합니다. 진실이야 알 수 없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그녀를 보면서 가끔은 이해하기 힘든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약간 알 것 같습니다. 아마 몰입의 즐거움을 알기 때문이겠죠. 행동은 그녀에게도 무거운 일일 테니까. 약간의 긍정과 조증을 더해 몸을 일으키는 것일까 상상해봅니다. 예로부터 뜨거운 것들은 위로 뜨게 되어 있습니다. 조금은 낯부끄럽지만, 후배처럼 SNS에 파이팅을 남겨볼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글을 마무리하고 올릴 듯한데, 남 눈치 볼 필요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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