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지 않은 사이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by 최광래

친구와 메신저를 주고받다가 '미친'을 입력하려 했다. 그렇게 화면에는 굵은 이탤릭 글씨로 michin이 입력되었고 친구는 그게 뭐냐며 웃음 섞인 핀잔을 주었다. 유치하면서도 웃긴 상황에 잠깐 채팅창을 'ㅋㅋ'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 건 어디서 찾은 거냐는 친구의 질문에, "아 이거 예전에 소개팅한 사람이 해 준 거야."라고 답했다.


얼핏 기억하기로 그녀는 개그 스타일이 참 잘 맞았다. 사람이 사는 데 유머 한 스푼만 있어도 삶이 더 윤택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아무래도 그녀와 나는 그런 가치에 부합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주고받는 대화는 대화라기보다는 웃음을 주고받는 일에 더 가까웠다. 물론 소개팅이 연인을 전제로 하는 만남이고, 연인이 웃겨서만 되는 것은 아니기에 몇 번의 만남을 끝으로 우리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녀가 남긴 웃음의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굵게 기울어진 michin이라는 글씨만큼이나 가끔씩 나오지만 분명했다. 그렇지만 다시 만날 일도, 딱히 다시 연락하고 싶은 생각도, 아쉬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소개팅이었기 때문일까.


최근 동아리에 강연을 다녀오면서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현금 기부니까, 일단 돈을 좀 보내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난 입은 닫고 지갑은 열 수록 좋은 선배라고 생각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선배의 지론이었다. 참고로 나는 입을 닫을 자신은 없으니까 지갑을 자주 여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어쨌든 그렇게 작은 기부로도 큰 도움이 된 것처럼 뽕에 차 있으면, 그다음은 어찌해야 할지를 생각한다. 그저 입을 열면 되나? 아니, 그 이전에 그냥 말을 걸면 되는 걸까?


그래도 서른이라고 사람 관계에서는 일단 친분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 친분, 친해지는 것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친해져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어떻게 친해지는 거더라? 그냥 말을 걸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가끔은 술에 취해 새벽에 길거리를 걸으면 친해지는 거였나? 자연스럽게 새벽을 향하던 술자리가 없어진 세상에서 어떻게 친해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전에도 어떻게 사람들하고 친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학교, 동아리, 회사 등 여러 집단을 거치며 꽤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다. 그중에는 정말 인생을 걸고 싶을 만큼 소중한 친구들도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그런 찐한 관계는 아니지만, 일방적인 신뢰일지라도 가깝게 느끼는 그런 친구들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친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명을 붙잡고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냐고 묻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자연스럽게 전화를 걸어 얼굴을 볼 수 있는 친구들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적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사람한테 그래도 되나?' 싶었다.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라는 말이 있다. 소개팅을 거절할 때 주로 쓰는 멘트였는데. 이제는 자연스러운 인연이 어디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모든 만남, 순간들도 사실 다 인위적인 노력이 들어갔던 것 아닐까. 그게 나였던 상대였던... 자연스럽게 친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도 하나 확실해진 것이 있다. 인위적이든 자연스럽든 가까워질 사람은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그토록 노력해도 잠깐이라도 스치기 어려웠지만, 어떤 사람은 우연의 우연이 겹쳐 의도치도 않은 곳에서 많은 것들을 나누는 사이가 되곤 했다. 그와 동시에 순간에 충실한 것이 관계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도 알게 됐다.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며 의미 부여하고 계획하던 사람보다, 우연의 순간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마치 굵은 이탤릭체처럼, 고딕체로 가득한 삶에서 조금은 다른 기억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느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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