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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광래 Sep 19. 2021

처음부터 잘했다면 그건 튜토리얼이라서

멍청이의 산에서 탈출하는 방법

 TV에 한 연예인이 나와 외줄 타기를 하고 있었다. 사뿐히 몇 발을 지르밟더니, 여지없이 밧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고수의 표현에 의하면 '지옥 구간'에 빠진 탓이었다. 양 끝의 고정대에서 가장 먼 구간인 중간 구역은 밧줄의 흔들림이 심해 꼭 단단히 밟으며 지나가야 한다고 고수는 말했다. 지옥 구간은 고정대에서 첫 발을 떼듯 밟으란 의미에서 '초심'이 중요한 구간이다. 그와 동시에 초심을 잃으면 언제든 빠질 수 있는 곳이 지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 연휴를 맞이하기 전 날 점심, 신입에게 기름칠 한 번 못해줬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파트장님 덕에 삼겹살집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회사 생활에 대한 주제로 돌아갔고, 고기 몇 점과 함께 선배들의 신입 사원 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매일 아침 구호를 외치게 한 선배부터, 서류철로 머리와 등짝을 그렇게 때리던 못난 사람들까지. "그땐, 왜 그렇게 쫄아서 가만히만 있었는지 모르겠어." 웃으면서 잔을 비운 파트장님의 웃음이 왠지 모르게 씁쓸했다. "그래도 확실히 그렇게 하니까 긴장이 되긴 했어요. 머리에서 집중력이 깨지는 순간 사고는 항상 터지더라고요. 방법은 참 별로지만 긴장감은 잃어선 안 되는 것 같아요." 옆에 있던 다른 직원분이 이야기를 거들었다. 가스불 꺼진 솥판 위에서 하나 남은 삼겹살 조각이 천천히 식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 전에 다니던 회사 대표와 한강을 걸으며 '더닝 크루거' 효과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문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구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효과인데, 회사에 다니기 전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난 지금까지 그녀는 항상 '방심'에 대해 이야기했다. 방심하면 여지없이 세상이 나를 고꾸라트린다고, "나대면 처맞는다."를 신조처럼 자주 반복했던 기억이 났다.

재미로 보는 더닝 크루거 효과

 그러고 보면 문제는 항상 방심해서 발생했다. 아는 게 없으니 조금만 해도 다 알 것 같고, 이전의 경험을 빗대서 현상을 이해해놓고는 '다 안다.'라고 생각하기 쉬웠다. 무슨 클리셰처럼 "대충 보니 알 것 같다."는 말을 하는 순간이 가장 모르는 순간이었고, 여지없이 사고가 터지는 순간이었다. 앞서 말한 방송에서 연예인도 몇 발을 곧잘 떼다가 갑자기 외줄을 통달한 사람처럼 반동을 주며 통통 거리기 시작하더니 여지없이 지옥 구간에서 자빠지고 말았다. 


 커피를 마시며 자빠졌던 지난날들을 생각했다. 파채 몇 번 썰어봤다고 칼질에 속도를 내다가 손가락을 자를뻔한 날, 고속도로 몇 번 타봤다고 방심하다가 후암동 골목길에서 급브레이크에 목을 삔 날, 고작 강의 몇 번 했다고 기획에 통달한 척하다가 마주한 실무 프로젝트에서 일주일 내내 밤을 새웠지만 아무것도 못 했던 밤, 다 안다고 생각했다가 곪아버린 상처를 알아주지 못해 정리한 관계 때문에 눈물 흘린 밤까지.


 감사하게도 인생은 재시작이 없지만 튜토리얼은 있는 것 같다. 초보자에게는 그렇게 많은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다. 알고리즘에 따뜻함이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니 내가 조금이라도 잘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내가 잘하는 게 아닌 지금이 튜토리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내가 잘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봐주고 있는 거라고. 그렇지만 철이 없는 나는 또 방심하고 다치고 자빠질 것이다. 어쩌면 그게 멍청함의 산꼭대기를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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