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우리는 왜 N잡러가 되었나
3) 현대적 관점에서 본 과거 인물들의 N잡 활동가들
토마스 제퍼슨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정치인 / 건축가 / 발명가 / 작가 / 와인 애호가 / 조류학자
제퍼슨은 회전식 책꽂이를 발명하고 폴리그래프 기계를 개선하는 등 발명 활동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게일어를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도 재능이 있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1743-1826)은 미국의 건국 아버지 중 한 명으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인, 외교관, 법률가, 건축가, 과학자, 농업 혁신가, 교육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제퍼슨은 1743년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다방면에 걸친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윌리엄앤메리 대학에서 계몽주의 사상을 접하며 인간 이성과 지식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고전문학, 철학, 과학, 음악, 건축 등 폭넓은 분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법률가로서 제퍼슨은 당대 최고의 실력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5년간의 집중적인 법학 공부를 통해 영국의 고대 법률부터 계몽주의 법철학까지 폭넓게 습득했습니다. 이러한 전문적 지식은 후에 그의 정치적 경력에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제퍼슨의 가장 큰 업적은 미국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한 것입니다. 그의 뛰어난 문장력과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된 독립선언서는 미국의 건국 이념을 담고 있으며, 특히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구절은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제퍼슨은 미국의 3대 대통령(1801-1809)을 역임하며 루이지애나 매입,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부 탐험 등 국가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작은 정부와 시민의 자유, 종교와 국가의 분리 등을 지지했으며, 이는 현대 미국 정치 체제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건축가로서 제퍼슨은 자신의 저택인 몬티첼로와 버지니아 대학교의 설계에 참여했습니다. 특히 몬티첼로는 그의 건축적 재능을 잘 보여주는 걸작으로, 고전주의 양식을 미국적으로 재해석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버지니아 대학교의 '아카데미칼 빌리지'는 1976년 미국 건축학회에 의해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가장 위대한 건축적 성과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과학자이자 농업 혁신가로서 제퍼슨은 새로운 발명품과 과학적 발견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농업 기술 발전에 힘썼으며, 이는 당시 미국 경제의 근간이 되는 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는 미국이 자급자족하는 경제 체제를 이루기 위해 농업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교육자로서 제퍼슨은 1819년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교육이 자유 사회의 근간이며, 지식이 없는 자유는 지속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버지니아 대학교는 학문적 자유와 독립적 사고를 중시하는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제퍼슨의 자연관은 그의 다재다능함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자연을 신의 창조물로 보는 기독교적 시각, 국가적 정체성의 의미소로 보는 정치철학적 시각, 그리고 탐구의 대상으로 보는 과학적 시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자연관은 그의 정치 철학과 과학적 탐구, 그리고 건축 및 조경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제퍼슨의 삶에는 모순점도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중성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유산에 대한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정치, 법률, 건축, 과학, 농업,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역사 속의 'N잡러'였습니다. 그의 다재다능함과 폭넓은 지식은 미국의 건국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미국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제퍼슨의 삶은 전문성과 다양성의 균형, 그리고 지식의 통합적 적용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입니다.
마야 안젤루
마야 안젤루(1928-2014)는 20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다재다능한 인물로, 현대의 'N잡러'와 유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작가, 시인, 배우, 감독, 시민권 운동가, 교육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안젤루는 6개 언어(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히브리어, 판테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초기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케이블카 차장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안젤루는 1928년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인종차별과 성폭력 등 힘든 경험을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녀의 삶은 끊임없는 도전과 성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작가로서 안젤루의 가장 큰 업적은 1969년 출간된 자서전 "I Know Why the Caged Bird Sings"입니다. 이 책은 그녀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의 경험을 솔직하게 다루며 인종, 정체성, 회복력 등의 주제를 탐구했습니다. 이 작품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안젤루를 문학계의 스타로 만들었고, 현재까지도 미국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후 6권의 자서전을 추가로 출간하며 자신의 삶을 통해 미국 사회의 변화를 기록했습니다.
시인으로서 안젤루는 "And Still I Rise", "Phenomenal Woman" 등의 시집을 발표했습니다. 특히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에서 "On the Pulse of Morning"이라는 시를 낭독하며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취임식에서 시를 낭독한 여성 시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녀의 문학적 업적과 사회적 영향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시민권 운동가로서 안젤루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말콤 X 등과 함께 활동하며 인종 차별 철폐와 평등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녀는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의 북부 조정관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연극과 영화 분야에서도 안젤루는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961년에는 "The Blacks: A Clown Show"라는 연극을 제작했으며, 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 쓴 최초의 오프브로드웨이 연극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1972년에는 "Georgia, Georgia"라는 영화의 각본을 썼는데, 이는 주요 영화사에서 제작된 영화 중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 쓴 최초의 각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교육자로서 안젤루는 1982년부터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에서 미국학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문학, 윤리학, 신학 등 다양한 분야의 강의를 했으며, 많은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안젤루의 다재다능함은 수많은 상과 명예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녀는 50개 이상의 명예 학위를 받았으며, 3개의 그래미상, 퓰리처상 후보 지명, 토니상 후보 지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2011년에는 대중 연설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마야 안젤루의 삶은 현대의 N잡러들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그녀는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각 분야를 유기적으로 연결했습니다. 작가로서의 경험은 그녀의 시민권 운동에 깊이를 더했고, 배우와 감독으로서의 경험은 그녀의 문학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안젤루의 성공 비결은 끊임없는 학습과 도전 정신,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키워나갔으며,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마야 안젤루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다재다능한 인물로, 현대의 N잡러들에게 중요한 롤모델이 됩니다. 그녀의 삶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이를 창의적으로 연결하는 능력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안젤루의 legacy는 오늘날까지도 문학, 예술, 인권 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입니다.
김정희
김정희(1786-1856)는 문학가, 서예가,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추사체를 개발했으며, 고대 석문에 대한 역사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또한 조선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한 주요 저술을 남겼습니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예술가로, 'N잡러'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그는 문인, 서예가, 화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김정희는 1786년 경기도 광주의 마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남인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며 개혁 사상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5세에 서울로 올라온 후에는 이가환과 매부인 이승훈 등을 통해 이익의 학문을 더욱 깊이 공부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실학적 사고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김정희의 다재다능함은 그의 다양한 호칭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는 완당, 추사, 예당, 시암, 과파, 노과 등 100여 개가 넘는 호를 사용했는데, 이는 그의 폭넓은 관심사와 다양한 활동 영역을 반영합니다.
서예가로서 김정희의 가장 큰 업적은 '추사체'의 창안입니다. 추사체는 김정희가 중국 금석학 연구를 통해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독창적인 서체입니다. 이 서체는 예서와 행서의 특징을 결합하여 새로운 미학적 경지를 개척했습니다. 김정희는 "70년 동안 열 개의 벼루를 갈아 뚫었고, 천 자루의 붓을 닳아 없앴다"고 말할 정도로 서예 연마에 힘을 쏟았습니다.
금석학자로서 김정희의 업적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1816년 북한산에서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고 고증하는 등 한국 금석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예당금석과안록』, 『진흥이비고』 등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화가로서 김정희는 문인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습니다. 특히 그의 대표작 「세한도」는 제주 유배 시절의 고난과 제자에 대한 애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구도와 절제된 표현으로 깊은 정서를 전달하는 김정희 예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학자로서 김정희는 경학, 역사학, 천문학, 지리학, 음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특히 그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은 조선 후기 실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고증학적 방법론을 통해 기존의 학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김정희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정치적 부침을 겪었고, 1840년에는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의 학문적, 예술적 활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배 생활은 그의 예술 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정희의 'N잡러'적 면모는 그의 다양한 관심사와 활동을 통합적으로 발전시킨 데서 잘 드러납니다. 그의 서예는 금석학 연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그의 그림은 시문학적 소양과 결합하여 독특한 예술 세계를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그의 학문적 연구는 예술 활동에 깊이를 더해주었습니다.
김정희의 업적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추사체는 현대 서예의 한 유파를 이루었고, 그의 학문적 업적은 한국학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실사구시 정신과 고증학적 방법론은 현대 학문 연구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김정희는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각 분야를 유기적으로 연결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N잡러'였습니다. 그의 삶은 전문성과 다양성의 균형, 그리고 지식의 통합적 적용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N잡러'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김정희의 삶은 깊이 있는 전문성과 폭넓은 다양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