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내 아름다운 정원'은 말 그대로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에 주목한 기획입니다. 지금까지 소개했듯이 도시에선 계절마다 많은 꽃이 피어납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흙이 드러나는 모든 곳에서 꽃이 피고 지지만, 겨울에는 황량한 풍경을 피할 수 없지요.
도시에 다가올 봄을 기다릴 인내심이 부족하다면 움직여야 합니다. 인내심이 부족한 저는 매년 봄이 오기 전에 충남 태안 천리포수목원에 들릅니다. 볕이 잘 들어 따뜻한 이곳만큼 봄꽃을 남들보다 먼저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드물거든요. 게다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까지 멋지니 봄을 먼저 맞이하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가 드뭅니다. 천리포수목원에선 빠르면 2월, 빠르면 1월 중순부터 봄꽃이 피어납니다. 아래에 소개할 꽃들은 지금 천리포수목원에서 모두 볼 수 있는 꽃들입니다.
먼저 8회 '봄은 매화 향기를 타고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로 소개한 매화입니다. 천리포수목원에는 구불구불한 가지가 매력적인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이 나무는 전국 어느 곳보다도 빨리 꽃을 피우는데, 저는 심지어 1월 초에도 이 나무가 꽃을 피운 모습을 본 일이 있습니다.
봄꽃 중에서도 매화는 향기로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꽃입니다. 매화는 단아한 꽃의 모양과 대조되는 그윽한 향기로 뭇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이 때문에 화려함을 멀리했던 옛 선비들은 매화를 유독 아꼈습니다. 조선 초기의 문신 강희안(1419~1464)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 ‘양화소록(養花小錄)’은 꽃의 품계를 1품부터 9품까지 나눠 매화를 1품으로 꼽았고, 퇴계 이황(1501~1570)의 유언은 “매화에 물을 줘라”였을 정도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7회 ‘겨울의 끝에서 봄을 밝히는 등불 동백’에서 소개했던 동백입니다. 겨울이면 천리포수목원에선 동백이 한창입니다.
동백이 다른 꽃들과 비교해 유별난 점은 지고 난 뒤에도 아름답다는 점일 겁니다. 동백 그늘 아래에선 시들기도 전에 송이 채 떨어진 동백꽃들이 새로운 꽃밭을 이루는 모습을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생기 있는 꽃송이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며 처연함을 느끼기도 전에, 가지 여기저기서 동백꽃이 송이 채 하나둘씩 툭툭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옵니다. 이 때문에 동백의 절정은 가지에 매달려 있을 때가 아니라 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04회 ‘동지섣달에 피는 봄의 전령사 납매’로 소개했던 납매입니다. 2월이면 천리포수목원에 짙은 향기를 바람에 흩뿌리는 반가운 꽃입니다.
납매는 꽃의 크기가 앙증맞지만, 향기는 꽃의 크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짙고 그윽합니다.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피어나 향기를 흩뿌리는 작고 노란 꽃잎은 그 자체로 움츠러든 사람들의 마음을 녹입니다. 겨우내 무채색으로 뒤덮였던 세상을 깨우는 색과 향기가 새삼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6화 '풍년화는 안다…추위를 견뎌야 봄이 온다는 걸'에서 소개한 풍년화입니다. 천리포수목원에선 노란색 꽃을 피우는 풍년화와 붉은색 꽃을 피우는 풍년화를 한 번에 볼 수 있습니다.
풍년화는 먼저 독특한 꽃 모양으로 눈을 사로잡습니다. 가늘고 길게 갈래진 노란 꽃잎은 마치 잔치국수 위에 올리는 계란 지단이나 색종이를 연상케 합니다. 꽃 전체 모양은 종이로 만든 제기나 먼지털이를 닮았죠. 사실 풍년화는 피부 미용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치하젤(Witch Hazel)이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식물입니다. 풍년화의 수피(樹皮)와 잎에서 추출한 성분은 염증을 완화하고 민감한 피부를 진정시키는 능력이 뛰어난 천연 항균 재료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풍년화 추출물은 화장품, 물티슈 등에 기능성 원료로 쓰이고 있죠.
5화 '봄의 힙스터는 복수초를 찾아 떠난다'에서 소개한 복수초입니다. 천리포수목원에서 땅을 보고 걷다보면 복수초가 피어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복수초가 미리 펼쳐내는 봄은 생존전략의 결과물입니다. 복수초는 지난 계절 뿌리에 저장해 둔 녹말을 분해해 스스로 열을 발산합니다. 그 열은 주변에 쌓인 눈을 녹이고 언 땅을 풀어주죠.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도 복수초의 꽃잎 주변은 영상 8도가량을 유지합니다. 또한 복수초는 한낮에만 꽃잎을 열어 최대한 볕을 모아 자신의 몸을 데우고, 나머지 시간에는 꽃잎을 닫아 온기를 보전합니다. 이 같은 독특한 생태와 생명력 때문에 복수초는 ‘복을 많이 받고 오래 살라(福壽)’는 의미를 담은 이름을 가지게 됐죠.
10화 '우리는 산수유 꽃그늘 아래서 봄의 춤을 춘다'에서 소개한 산수유입니다. 산수유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지만, 피우기 직전의 모습이 앙증맞습니다.
산수유꽃 개개는 뜯어보면 그리 볼품이 없습니다. 꽃망울의 크기는 좁쌀처럼 작은 데다, 만개한 꽃의 생김새 역시 밋밋하기 짝이 없죠. 이처럼 허약한 산수유꽃의 모습을 장관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힘은 군집입니다. 무리지어 일제히 피어나는 산수유꽃은 다른 꽃들과는 달리 먼 곳에서 바라봐야 아름다움을 뽐냅니다. 바람이 불면 파스텔 톤 노란 물결로 일렁이는 산수유 꽃구름은 늦봄에 황홀한 꽃비를 내리는 벚나무처럼 시야를 압도하는 대신 따뜻하고도 포근한 풍경을 연출합니다.
12화 '내가 개나리와 진달래로 보이니?'로 소개했던 영춘화입니다. 영춘화는 개나리보다 일찍 꽃을 피우는데, 천리포수목원에선 더 일찍 꽃을 피워 즐거움을 줍니다.
영춘화의 늘어뜨린 가지와 노란 꽃잎은 언뜻 보면 개나리와 비슷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생김새가 확실히 다릅니다. 영춘화의 꽃잎은 5~6장이지만, 개나리의 꽃잎은 4장입니다. 영춘화의 줄기는 녹색인 반면, 개나리의 줄기는 회갈색입니다. 처음엔 둘이 비슷하게 보여도 익숙해지면 멀리서도 둘을 구별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49화 '춥고 메마른 땅에 눈처럼 내리는 설강화'에서 소개한 설강화입니다. 보기 쉽지 않은 꽃인데, 천리포수목원에선 매년 먼저 봄보다 먼저 청초한 모습으로 피어나 방문객들을 사로잡습니다. 49화의 마지막 문단을 인용하며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척박한 계절을 헤치고 피어난 설강화는 봄의 많은 풍경들을 상상하게 합니다. 연둣빛으로 곱게 물든 산하, 온갖 색으로 피어난 들꽃들, 그 위로 쏟아지는 바삭바삭한 햇살……. 설강화의 꽃말은 ‘희망’입니다. 또한 설강화는 1월 1일의 탄생화이기도 합니다. 설날이 지나고 나야 새해가 왔음을 실감합니다. 지난해 우리는 밥 한술을 넘기기 위해 얼마나 뜨거운 삶을 치러내야 했던가요. 그 뜨거운 삶이 새해엔 감동으로 채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눈이 내려도 찬바람이 불어도 굴하지 않는 저 작은 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