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기(節氣) 중 첫 번째 절기인 입춘(立春)은 늘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눈이 펑펑 내리거나 칼바람이 불어 ‘봄이 시작한다’는 절기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드는 일이 흔하니 말입니다. 절기와 실제 날씨 사이의 괴리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24절기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중심지였던 황하 유역의 기후에 맞춰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도는 길인 황도를 따라 15도씩 돌 때마다 변화하는 황하 유역 기후를 묘사해 절기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황하와 한반도의 위도가 서로 다르니 날씨 차이가 없다면 이상한 일이죠. “대한(大寒)이 소한(小寒) 집에 놀러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조상님들도 24절기가 우리 기후와 맞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방증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춘이란 말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나요. 어쩌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입춘은 ‘봄이 시작한다’는 의미보다는 ‘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까운 의미를 가진 절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입춘이 오기도 전에 개화 소식을 전하는 납매(臘梅)는 ‘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확신을 더해주는 작은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절기가 몸으로 느끼는 계절을 앞서듯, 몇몇 꽃들은 봄이 시작되기 전부터 미리 봄을 재촉합니다. 납매는 그중에서도 가장 부지런한 녀석입니다. 납매는 나무에서 피는 꽃들 중에선 개화시기가 가장 빠른 편입니다. 음력 섣달(12월)인 납월(臘月)에 핀다고 해 납매라고 부른다죠. 그래서 별명도 ‘섣달에 피는 매화’입니다.
사실 납매는 받침꽃과 낙엽 관목으로 장미과에 속하는 매화나무와 서로 먼 사이입니다. 꽃 모양과 색도 서로 확연하게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납매가 매화의 일종으로 오해 받는 이유는 매화처럼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향기로운 꽃을 피우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납매가 매화보다 흔하게 보이지 않는 꽃이란 이유도 있겠죠. 이래저래 상황을 종합해 살펴보면 납매는 ‘쪽수’에 밀려 매화도 아닌데 매화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납매 입장에선 황당한 일이겠지만, 꽃은 사람보다 너그러우니 못 본 척 넘어가주길 바랄 뿐입니다.
납매는 꽃의 크기가 앙증맞지만, 향기는 꽃의 크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짙고 그윽합니다.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피어나 향기를 흩뿌리는 작고 노란 꽃잎은 그 자체로 움츠러든 사람들의 마음을 녹입니다. 겨우내 무채색으로 뒤덮였던 세상을 깨우는 색과 향기가 새삼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겨울에 납매를 보는 일은 각별하지만, 그만큼 부지런해야 합니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며 미적거리면 때를 놓치기 십상이죠. 부지런히 움직여 꽃을 피운 나무 아래에 서서 꽃향기를 맡으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들 겁니다. “이불 바깥으로 나오길 참 잘했구나!”
납매를 만나는 방법 : 납매는 보통 1~2월에 꽃을 피우는데, 주변에서 마주치기 그리 쉽진 않습니다. 납매를 헤매지 않고 쉽게 만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뉴스를 검색해보는 겁니다. 겨울에 꽃이 피어나는 일이 흔치 않다보니, 납매가 꽃을 피우면 어떻게든 뉴스로 나옵니다. 납매 개화 소식은 주로 먼 남쪽 지역에서 들려오는 편인데, 이보다 북쪽에 위치한 충남 태안 천리포수목원은 남쪽 지역으로 가지 않고도 납매를 접할 수 있는 명소 중 하나입니다.